학술
계몽주의가 자초한(할) 자기 파멸
우리는 서양 사상의 흐름을 말할 때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서구 이성의 위대함을 모든 분야에서 하루가 다르게 입증하고 있던 시대였다. 합리적인 과학 지식과 기술의 급속한 성장에 힘입어 종교적 미몽을 타파하고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며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여 학문과 예술의 꽃을 피우던 그야말로 인간 능력의 절정에 도달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유럽을 유럽답게 정의하는 대명사가 되어 왔다.
하지만 다방면에 걸친 서구의 이러한 발전은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다른 민족과 국가들에게 강제적으로 이식됨에 따라 예상할 수 없었던 대항 세력을 키워온 결과를 낳고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소수의 강대국들은 이제 약소국들의 마지막 자원인 땅 속 ‘천연자원’까지 손을 대고 있다. 자신들에게 마지막 남은 유일한 재화이자 생존을 위한 마지막 자원인데, 강대국들은 이것마저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계몽주의 이래 경쟁하듯 발전해 온 서방 국가의 경쟁력은 다름 아닌 남의 땅 밑에 숨겨져 있던 것까지 속속들이 파헤쳐 찾아내려는 ‘고문 기술’과도 같은 양상을 띤다.
이렇게 세계화 논리의 확대는 바로 약소국 희생양들의 증가와 비례한다는 데 심각함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약소국의 대항이 전체 인류를 향해 자신들의 억울함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류를 위협하는 또 다른 세력이 되고 있다는 데 두 번째 두려움이 있다. 즉 평화적 대화 제안에 더 이상 속지 않는 약소국들이 희생양의 마지막 전투의 결기를 응집하는 것을 더욱 자극한다. 힘의 불균형과 철저한 고립, 원한과 억울함이 세계화의 얼굴이라고 진단하는 해체주의자 데리다는 테러리즘의 발생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최악의 폭력에 대한 호소는 ‘종종 들으려 하지 않는 귀’에 대한 유일한 응답”?지오반나 보라도리 지음,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외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6, 224쪽. 이다. 다른 어떤 호소 방법이 사라진 현장에는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어날 사태에 대한 무서운 진단이다.
외부 침입에 의해 자기 파멸을 직면한 희생양들의 자기 정당화는 도덕적 판단의 차원을 넘어선다. 일반적인 선악 판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행동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궁지에 몰린 희생양의 죽음을 압박하면 할수록 이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억울한 원한감정을 ‘순교자적 희생’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압박이 종교적 명분으로 연대를 맺고 동맹관계의 집단을 자극하면 대규모의 항전을 통해 인류의 공멸(共滅)을 자초하면서도 그것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류를 향한 ‘선지자적’ 사명이라고 여기도록 한다.
앞서 데리자의 지적에서 보듯이, 서구 계몽주의는 지난 두어 세기를 자신에게 되돌아올 위협을 망각하고 자신들에게로 향할 위협을 스스로 키워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취지가 ‘자기 삶에 대한 주인이 자신임을 스스로 자각하도록 하라’는 데 있다면, 서구 계몽주의는 이 구호를 스스로 뒤집어버리고 자신들의 문화와는 다른 약소한 타자(他者)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개념을 사용해 보면, 이러한 계몽주의의 태도는 어리석게도 예고 없이 방문하는 ‘무서운, 너무나 무서운 손님’을 스스로 키워왔던 셈이 된다.
자기 호소의 기회를 점점 박탈당한(할) 희생양의 자기 보존의 전략이 인류를 더욱 경악하게 할 사건으로 다가올 것은 논리적 구조상 필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호소 방법을 점점 차단당하면 희생양의 자기 보존 전략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지난 세기 동안 너무나 많이 드러났다. 그리고 최첨단 매스 미디어 시대에 우리는 매일 실시간 그것을 손 안에서 지켜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위협 소식을 손 안에 혹은 품 안에 넣고 살아야 하는 세계화 시대의 세계시민의 불행한 미래는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방관하고 맹목적으로 이식했던 지난 역사의 필연적 결과일 수도 있다.
서구 계몽주의에 감추어졌던 탐욕의 발톱은 그 실체와 진실이 무엇인지 이제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서방 아니 이제는 전 대륙을 망라하는 초강대국들의 자본주의는 19?20세기 제국주의 시대보다 더 발전된 기술력으로 악랄하게 침략 전쟁을 전개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세력으로 서로 정체를 묻지 않고 모여드는 테러리스트들의 동맹은 더욱 무서운 위협으로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자기 파멸로 끝나지 않고 강대국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세계 구원’의 의미가 있다는 명분으로 자폭 테러의 장소와 시간을 물색하고 있을지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재앙들과 하나님의 자기 자녀에 대한 분명한 보호, 이 결코 시대를 정의할 수 없는 혼돈과 불안 사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눈물지으면서 가르치시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볼 수밖에 없다.
41 예수께서 그 성읍에 가까이 오셔서 보시고 그 성읍에 대하여 울며 42 말씀하셨다. “너도 이 날에 평화에 관한 것들을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그것들이 네 눈에 감춰져 있구나. 43 그 날들이 너에게 임할 것이니, 네 원수들이 네 주위에 토성을 쌓고, 너를 포위하고, 사면으로 너를 가두고, 44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돌보시는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바른성경/ 눅 19:41~44 )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미완으로 남을 계획: ‘계몽주의’의 운명 |
종교 타락과 테러리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