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서양 휴머니즘 교육: ‘인간 농장’에서 벌어진 ‘사육의 폭력
“학교 모델과 교육 모델로서의 근대 휴머니즘은 끝났다.” *이진우 외, 『인간 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독일 슬로터다이크 논쟁을 중심으로』, 서울: 문예출판사, 2004, 76쪽 재인용 이 말은 지식 전달의 배후에는 항상 지배에 대한 탐욕이 자리 잡 고 있다고 지적한 니체를 계승하는 사상가, 페터 슬 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 독일 칼스루 에 예술대학 철학/미학 교수로 재직 중)의 말이다. 한마디로 휴머니즘 교육은 ‘반휴머니즘’이며 교육 환 경의 개선과 발전이란 결국 인간 사육 농장의 확장 이라는 말이다. 미래 세대의 건전한 양육이라는 말 은 허구 중 가장 비열하고 사악한 허구이며, 교육 예 산의 확대는 ‘인간 사육의 농장’ 증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상의 위험한 시대 진단은 ‘신의 죽음’과 그러한 현상의 확대를 예고했던 니체 서거(1900년) 100여 년이 될 무렵, 독일 바이에른 주 엘마우 성에서 개최 된 하이데거 국제학술대회에서, 슬로터다이크가 <인 간 농장을 위한 규칙: 하이데거 휴머니즘 서한에 대 한 답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독서를 통한 계몽과 같은 서구의 인 문학적 교육은 결코 인간의 야만성을 개선할 수 없 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제는 현대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을 통해 인간을 선별하고 사육하는 것을 적 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한 점이다. 인간 사육을 위한 우생학의 필요성 강조는 독일의 나치 악몽을 금세 연상시켰으며 참석한 유대인 학자 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유전자 조작으로 신인류의 창조 가능성을 이미 타 진하고 있던 당시 분위기에서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 자들은 그의 설파에 민감한 반응과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1999년 7월 말부터 2000년 1 월 말까지 6개월간 27회의 신문 지상을 통한 논쟁을 야기했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의 이러한 주장 이면 에는 ‘문자화된 텍스트 교육의 완벽한 실패’를 전제 하고 있다.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그가 첨단 유전공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 대해 던지는 근본 적인 물음이다. “휴머니즘이 인간 길들이기의 학파 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아직 인간을 길들이는가? (……) 인류를 교육하는 이제까지의 모든 실험에도 불구하고 누가 교육하고 또 교육자들이 무엇을 위하 여 어떤 것을 교육하는가가 불투명한 채로 있다면,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가?”*앞의 책, 『인간 복제에 관한 철학 적 성찰』, 208쪽 재인용
이 철학자는 인간의 본성을 ‘야만성’으로 보고 있 으며, 이제까지 유럽 휴머니즘은 이러한 야만성을 길들이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책이나 문자 매체 그리고 인문학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사용하여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인다고 확신 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은 최고로 가치 있 는 존재가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기 독교 전통을 따르는 유럽 휴머니즘 교육은 성직자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 행위’였다. 특히 의지박약의 나 약한 인간들이 강한 자에 대하여 품은 원한감정을 ‘진 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달래면서 나약한 자신들은 선하고 강한 자는 악한 자로 사육해온 역사이다. 다 시 말해 유럽의 휴머니즘 교육은 인간을 길들여온 불순한 사육 행위였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니체의 지적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유전공학의 첨단 기술을 통해 ‘새롭게 사육 가능한 인류’의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마치 가축 취급하는 것과 같아 매 우 불쾌하며 심한 반발을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인간 객체를 선별하여 사육하고 있는 인간 농 장’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실 니체는 ‘초인(overman)’이라는 철학적 개념 을 통해 누구보다도 ‘새로운 종류의 새로운 인류’를 갈구한 바 있다. 그것이 어떤 방식에 의해 구체적으 로 실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유럽의 갑갑한 휴머니즘을 주도해온 ‘도덕적 기독교’의 족쇄에서 벗어나고자 파 격적인 발상으로 몸부림쳤음은 틀림없다.
그의 이러한 갈구가 분명하게 전해졌기 때문인 가? 우리는 슬로터다이크와 같은 니체의 통찰을 구 체화하고자 하는 새로운 인본주의자들 즉 포스트휴 머니스트들의 지속적인 등장을 볼 것이다. 이들의 예측대로 혹은 적극적인 요청에 따라 인류는 점점 인간 농장에 길들여지는 동물이 될 것이다. 교육 이 념과 그 목적의 상실로서 신의 죽음의 결과, 기독교 중심의 인간 길들이기 전통으로 완벽하게 실패한 유 럽 휴머니즘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이는 또한 지능적이며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다양한 ‘인 간 사육사’들이 이정표 없이 방황하는 ‘합리적 동물’ 가운데 자신들의 ‘사육장’에 적합한 동물, 즉 ‘잡혀 죽 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벧후 2:2)을 포획하는 데 더욱 혈안이 되게 할 것이다.
최소한의 자유를 위한 여지마저도 점점 박탈당하 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자기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의 말씀을 갈급한 심령으로 찾고 또 찾 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 는 은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31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 겠느냐? 32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 을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 리에게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느냐? (바른성경/ 롬 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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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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