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휴머니즘의 언어: 자기애(自己愛)의 포장지
“언어는 한 번도 긍정과 약속의 담지자로 파악되 지 않습니다.” * 슬로터다이크,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이진우·박 미애 옮김, 서울: 한길사, 2004, 177쪽 이 말은 서양 계몽주의 교 육의 완벽한 실패를 지적하는 독일 칼스루에 예술 대학 철학/미학 교수 슬로터다이크의 말이다. 앞의 책 중 제3부의 제목은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 니체 의 다섯 번째 ‘복음서’」다. 슬로터다이크는 니체를 인용하여 언어는 진리를 담고 있다는 서양 사상사 의 오래된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또한, 진리를 발견토록 한다는 교육의 목표는 허구적이다 못해 악의적임을 폭로한다. 동물 사육장처럼 교육 현장 은 체제에 빨리 적응시키기 위한 적절한 소모품들 양산하는 작업장이 된다.
이러한 슬로터다이크의 진단은 분명 ‘신의 죽음’ 이라는 가장 잔인한 명제를 제시했던 니체를 따르 고 있음에 틀림없다. 앞서 인용한 슬로터다이크의 명제도 역시 니체의 언어관을 계승하여 급진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긍정명제는 진리를 표현하는 가장 선명한 언어다. 예를 들면, ‘슬로터다이크는 독일 철학자이다’처럼 서술어가 긍정문으로 되고, 그 사실이 일치할 때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명제의 본질을 최초로 문제 삼아, 이것은 어 디까지나 인간의 이해관계가 개입된 조작 명제라 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지향하는 궁극적 진리 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 어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진리를 표현하는 수단일 뿐인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없다면, 언어 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사라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언어야말로 ‘위험한 도구’가 된다. 왜냐하면, 언어 를 사용해서 온갖 거짓과 허위가 날조될 수 있기 때 문이다.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건 말건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는 그 자체로 그럴듯하게 얼마든지 날 조되어 왜곡된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니체의 언어관에 기초하여 슬로터다이크는 명제 자체에 대한 허구적 성격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의 지적 공동 협약으로서 ‘약속’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언어는 객관적 진리를 전달 하는 매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칭 송하기 위해 고안한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산물이 다. 신을 향한 찬양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도 결국 인간 자기 칭송을 극대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신의 말씀으로서 성경은 분명히 신의 말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언어를 만든 인간에 대 한 숭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망각하면 마치 언 어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는 허 구 속에 빠진다. 언어를 배우고 숙달하는 것은 처음 부터 끝까지 오직 인간의 자기 칭송에 대한 숙련 과 정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인상적인 역사적 사건을 한 예로 든다. 미국독립선언서의 편집자이며 미국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4개 국어로 된 신약성경 6권을 조각조각 잘라내어 붙여서 개인 판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제퍼슨은 인간들의 영광을 칭송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 내용들, 곧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들을 과감하게 잘라낸다. 그 리고 인간 삶을 완성할 수 있는 ‘도덕적 규범’을 부 각시키는 데 몰두했다.
이로써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아들로서 예수님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예수님은 단지 뛰어난 상 상력과 도덕성 그리고 자선 행위의 화신일 뿐이다. 예수님의 심판 선언이나 병 고침의 기적 나아가 부 활 기록도 뺐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소설 의 주인공이 되고 동시에 제퍼슨 자신이 ‘그리스도’ 라고 하며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같은 탁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찬양한다.* 앞의 책, 189쪽 참조
니체는 자신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섯 번째 복음서’라고 명명했다. 즉 니체는 이 저작을 ‘새로운 성경’을 쓰는 일로 보았고, 이 저서 를 통해 자신은 ‘인류 역사가 줄 수 있는 최고로 영 광스러운 왕관’ * 앞의 책, 191쪽 재인용 을 받았다고 믿었 다. 인간의 미흡한 글쓰기의 산물인 성경의 부족함 을 니체는 자신의 저서에서 모두 극복했다고 자기 자신을 칭송했으며 그러한 서신을 지인들에게 흥 분해서 보냈다. 그가 성경에서 알아낸 것은 복음서 란 심신(心身) 약자들의 복수심과 원한감정이 도사 리고 있는 ‘자기찬양의 폭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니체 사상의 손자뻘 계승자쯤 되는 슬로터다이크 는 모든 휴머니즘은 허구이며 조작임을 폭로하고 있다. 인간은 조작당해 태어나고 사육 받아 길들여 지는 동물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고유한 독 자성을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어디에서 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신의 분명한 죽음을 전하는 것이 ‘다섯 번째 복음’으로 날조되는 시대에, 성도로서 그 생명줄은 어디에 있을지 그리 스도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자 더 깊은 고민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그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으니, 이 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요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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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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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휴머니즘 교육: ‘인간 농장’에서 벌어진 ‘사육의 폭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