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도(道) 일(一) 낳고……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만물은 음을 등에 짊어지고 양을 가슴으로 포용하고서 텅 빈 기로 조화를 이룬다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인지소오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위칭)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오직 고독과 부족과 양식 없음인데 왕과 공후들은 이것을 명칭으로 삼는다.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고물혹손지이익 혹이지이손)
그러기에 만물은 늘 줄어도 더해지고 더해지는데도 줄어진다.
人之所敎, 我亦敎之。(인지소교, 아역교지)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역시 가르칠 뿐이다.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부득기사)
강폭한 사람은 마땅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
나는 이것을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을 것이다.
(노자 42장)
노자의 도는 허(emptiness)요, 무(non-being)다. 이 무가 일을 낳는다. 일은 하나(the one)다. 하나는 논의의 흐름 상 만물에 앞서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즉 모든 존재들의 하나이자 존재들의 삶의 총합이어야 한다. 일은 어두움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과 비견될지도 모른다.
일이 이를 낳는다. 이는 둘이다. 유학에서는 태극이 동(움직임)해서는 양을 낳고, 정(고요함)해서는 음을 낳는다고 한다. 음과 양은 태극을 머금고 있으면서 서로가 존재할 때 그 의의를 지닐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음은 양이 있을 때만 그 자신의 존재 의의를 지니게 되고 양은 음이 있을 때만 그 자신의 의의를 지닐 수 있다. 사람과 만물이 음과 양을 기반으로 남과 여, 강과 산, 동물과 식물 등과 같이 상대를 기다려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계를 대대(對待)의 관계라 한다. 노자의 일과 이의 관계 역시 만물의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대대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과 이는 서로 상대를 기다려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상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삼을 낳는다. 일과 이의 관계는 하나만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과 이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생존조건이나 감정의 흐름 등 제삼의 관계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위해서 이는 삼을 낳는다.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일과 이의 관계 사이에서 이 관계들을 조정하고 유지하게 하는 제삼을 낳는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것이나 동물의 암수가 짝을 지어 새끼를 낳는 것, 식물 등이 번식하는 것 등이 그 구체적인 예다. 그러니까 삼은 만물의 조화를 의미한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짊어지고 양을 가슴에 안고 있다. 그 사이에 허한 기로 가득차서 조화를 이룬다. 노자의 만물은 이렇게 도에서부터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만물과 떨어져서 홀로 고독하게 되거나 모자라게 되거나 자신의 녹을 받지 못함을 싫어한다. 그래서 왕이나 공후들이 이런 부분들을 잘 조정하는 일을 자신의 명성으로 삼아야 한다. 그 여부가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을 덜어낼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더할수록 다른 사람은 덜어지게 된다. 도는 자신을 던다. 그래서 만물을 부하게 한다.
사람이 가르치는 바를 나(도를 깨달은 자)도 가르칠 뿐이다. 노자(성인)의 가르침이 별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이치를 벗어나서 억지로 하고 강포하게 하는 자는 마땅한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우리)는 이것을 최고의 가르침(敎父)으로 삼는다.
기독교는 생명을 낳는 종교이다. 신약시대의 첫 장을 여는 마태복음은 그 첫 구절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마1:1)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변하면서 하늘의 자손으로 승화된다. 하늘의 자손이 될 수 있는 것은 낳음에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마1:1)에서 시작해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로 낳음이 이어진다. 이 낳음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기독인 됨은 하나님의 자녀를 낳음에 있다. 기독인에게 낳음은 하나님의 형상의 나음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상대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조화를 이루는 낳음이다. 기독인은 등에도 가슴에도 하나님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비움이 필요하다. 나 자신이 풍성해지고자 하면 늘 모자라게 될 뿐이다. 아무리 풍성해도 더 풍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부족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늘 낳음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온전한 조화로움이 있다.
기독인들이여!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자녀를 낳고 자신의 욕심은 비워가자. 이렇게 해서 온 세상을 평안하고 조화롭게 살아가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기독인이 되어보자. 그런 기독인에게는 죽음조차도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기독인들이여!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최고로 삼아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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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박사(교육학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
도는 다시 돌아간다 |
도, 함이 없는 함 (Tao, Doing Without A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