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4-03-16 20:2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미디어 홍수와 바벨탑의 포로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니체 이후의 현대철학 〈83〉


언어란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표현하거나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음성이나 문자 수단을 말한다. 정보를 전달하는 자와 받는 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수단으로서 언어라고 하지만 실제로 언어밖에 다른 매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디어’(매체)라는 말은 대개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서 언어를 뜻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은 매체로서 언어에 의존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생각의 단계와 범위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의 단계가 높아진다거나 범위가 넓어진다는 말은 결국 인간의 생각이 모든 것들의 세계 즉 ‘전체’로 향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전체를 목표로 한다는 말은 생각하는 모든 것의 최초 원인 그리고 그것들의 궁극적 목표 나아가 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체로서 세계로 향하는 생각의 탐험은 바로 언어라는 도구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언어는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며 세계에 대한 판단 곧 세계관(Weltanschauung) 정립은 언어적 관념에 의존하게 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가 된다. 세계가 무한하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 사용 능력이 무궁하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언어는 반드시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담도록 강요하게 마련이다. ‘언어의 노예’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어떤 문화에 대한 고급 혹은 저급의 평가 척도는 사용하는 언어들과 그 범주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풍부한가에 좌우된다. 언어 사용의 정교함이 더할수록 문화적 우수성이 높다는 방증이라도 되는 듯 여긴다. 하지만, 언어상대주의자들과 문화염세주의자들에 따르면,✽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철학』, 이상엽 외, 서울: 북코리아, 2008, 154쪽 참조. 어떤 언어유형에 대한 우월성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다양한 언어를 통합하는 보편적 언어란 불가능하며 따라서 보편적 세계 이해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언어 규칙의 엄밀하고도 능숙한 사용이 문법과 논리의 틀 속에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가두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여 언어의 노예화를 심화시킨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라도 완벽하게 조작할 수 있는 초고속 정보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보면, 언어를 통한 ‘보편적 사유와 이념의 구축’이라는 말이야말로 정말로 믿을 수 없는 말이 된다.
  니체의 신의 죽음 선언 이후 절대 진리도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적 미디어를 통한 간단한 정보 전달도 액면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흐름은 언어에서 어떠한 수준과 질적 차이도 부정하게 한다. 정교한 문법적 구조가 없는 원주민들의 언어와 논리학에 근거한 유럽의 미디어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이러한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이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의 질적 차이가 없다면, 신적 계시인 성경의 고유성과 독자성도 허구가 되어 버린다.
  성경의 독자적인 권위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를 조금 지나 시작된 계몽주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현대의 미디어 철학은 계몽주의의 합리적 이성의 능력도 근본부터 부정하며 그 능력의 상징이었던 유럽적 문법과 논리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은 착각이었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디어 시대는 모든 정보가 완벽하게 조작될 수 있는 시대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참됨을 보증할 수 있는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 신앙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더욱 심각해진다. 사단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나게 하면서 인류를 유혹하여(창 3:3-5) 넘어지게 하였으며, 심지어 성경을 인용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유혹하였다(막 4:6). 성경 지식에 대한 확대가 진리에 점점 더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미디어는 물론 진리의 말씀마저도 사단의 유혹거리가 된다는 사실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약속이 내 생각과 언어를 지배해 주길 기도할 밖에.   

  내가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그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으니,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 15:5/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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