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미디어의 최후 전략: 문자기록의 폐기
자본주의 문화란 인간의 모든 욕망을 무한한 생산과 소비에 순응하는 자동 기계가 되도록 직설적이건 우회적이건 집요하게 강요한다. 즉 자본이 만든 생산품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또 다른 소모품이 되는 것이 이른바 ‘중산층’의 소비 미덕이며 사회적 의무라고 온갖 수작을 부린다.
현대의 소비 활동 패턴에 순종만 해야지 그러한 지배 구조 자체에 저항하면 상품 생산자와 유통업자의 몰인정한 뭇매를 맞게 된다. 이는 당연히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 지구촌 많은 소비자는 억압받는 자신의 욕망을 해방하려는 치열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해방일까, 아니면 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유통 기한이 정해진 소모품이 되는 과정일까?
욕망에 대한 억압은 우리의 상식으로 본다면 언제나 저항 운동과 저항 문화를 촉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순식간에 모든 소식을 전 세계로 알릴 수 있는 최첨단 매스미디어 시대에 거대한 저항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상상처럼 보인다. 그런데 욕망을 오히려 역이용하는 미디어 지배 세력들의 특성을 면밀히 살펴보면, 신속한 결집 요구 명령이 그리 의욕만 불태울 일은 아니다. 저항만큼 보장받을 수 있는 해방의 여지가 보인다면 좋으련만, 오히려 저항 문화는 더 강한 억압을 초래할 수 있다는 뼈저린 교훈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늪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쓸수록 명줄의 단축만 더욱 재촉할 뿐이다.
도덕적 양심에 나타난 권력 구조를 파헤쳤던 니체의 분석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살려고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만큼 상대방에 대한 도덕적 요구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며, 결국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악한 놈’으로 판단한다.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또한 더 착하게 살려고 할수록, 자신을 더욱 억압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은 ‘악한 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혹독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된다. 자기 억압을 자초하면서 동시에 타인은 ‘나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다양한 지배 방식이 주요한 특징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인간 해방의 여지를 묻고 있는 철학자들은 다양한 미디어의 활용을 통해 자신의 욕구와 욕망 실현을 부추긴다. 그런데 현대 미디어학자들은 욕망을 억압했던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것을 엄하게 지적한다. 바로 문자로 기록된 지식으로서 다른 기록물과는 달리 절대적 권위를 누렸던 성경에 대한 근본 입장을 바꿔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성경은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촘촘하게 얽힌 현대의 네트워크 체제에서 성경은 단지 무한한 조작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화된 성경의 권위는 오히려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해야만 견딜 수 있는 미디어 사회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고 비판한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편리한 텍스트를 빠르게 분간하여 욕망 구조에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성경 내용을 심사숙고하며 신의 뜻이 무엇인지 음미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노력이 결코 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가톨릭은 화려한 아이콘의 부활을 통해 텍스의 다양성을 최고 가치로 보는 미디어 체제에서 문자로 기록된 성경 권위를 없애는 운동의 최선봉에 선다. 그리고 자신들의 천 년 이상의 전통이 담긴 우상(아이콘)들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그것이 간편하면서도 모든 대중이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변한다.
일상사를 돌아보면 진리를 진지하게 찾는 문화는 점점 사라진다. 니체가 말한 절대 가치인 ‘신의 죽음’의 당연한 징후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아이콘의 확산으로 진실 혹은 진리를 향한 진지함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데 그 심각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진리 탐구의 진지한 노력 자체를 근절하려는 치밀하게 계산된 시도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물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펼치고 그 위에 나침판을 놓고 또한 망원경을 사용하는 진지함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 혹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지도 제작자의 노력을 무용하게 만든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찍어 놓기만 하면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위험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미디어는 욕망과 욕심의 논리에 따라 분류해 놓은 목록으로 인간을 손쉽게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검색에서 맛집, 쇼핑, 명소, 주유소 등등을 터치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거미줄에 포획 당한 벌레 신세와 같은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밀하게 계획된 장치는 인간의 욕망을 달래주기에 점점 부족함이 없어질 것이다. 이 미디어의 덫에서 현대인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절망감을 절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요 1:14)으로 오셔서 ‘진리에 속한 자는 누구나 내 음성을 듣는다’(요 18:37)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해 빌라도 총독이 던졌던 물음을 진지하게 던질 수밖에 없다.
빌라도가 그분께 말하기를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요 18:38 / 바른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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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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