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무의식, 자기중심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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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후기에 접어들어 자기 조상들의 기록 곧 구약을 배우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자신의 존재론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유대주의적 관점을 도입한다. 유대주의를 통상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바를 따른다면, 그의 철학은 인간의 능력으로 선과 악을 실천할 수 있다는 율법주의의 맥락 안으로 넣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인간 능력의 근거를 무의식을 선택하는 행위에서 근거를 찾는다.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서동욱 역, 112쪽)에서 구약의 선지자 요나(주전 8세기 말경의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언급한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의 멸망을 선언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그는 반대편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탄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폭풍으로 그 배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데,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은 잠을 잔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도 잠을 잘 수 있는지 일견 이해할 수 없으나, 어쨌든 모두 죽게 된 상황에서도 아랑곳없이 깨우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했다.
레비나스는 요나가 잠을 청하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면서도 잠을 청할 수 있는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자기 도주가 비록 수포로 돌아가고 바다로 던져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할지라도 의도적으로 의식을 잠시 접고 ‘무의식’을 요청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색다른 면모라는 것이 이 철학자의 지적이다. 인간이 무의식의 세계를 자처하는 것은 행동이 없는 세계로 물러나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자기 자리를 잡아가려는 생존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요나의 행위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의도야말로 포기와 소멸의 주체가 자신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자기모순의 노출이 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다’는 명제를 인간의 자기 자리 찾기로 이해한다. 데카르트가 확신한 인간의 원천은 결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세계는 아니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세계를 어떤 특정한 공간에 귀속시키지도 않으며, 또한 공허만 개념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세계의 단서를 인간의 ‘신체’에서 찾는다. 신체는 물질적 개념 그 이상이며 정신이 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인간이 자신의 의식 혹은 무의식을 영혼이라든지 정신과 관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신체를 통해 그리고 신체 안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에 따르면 신체는 “명사의 질서가 아니라 사건의 질서”(앞의 책, 119쪽)에 속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체는 하나의 개념으로 지칭할 수 대상이 아닌 대립과 모순, 갈등과 투쟁이 응집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무의식 세계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며 그곳에 거주할 수 있다면 무의식 세계는 이미 신체 활동의 연속이 되며 또한 자기정립이 일어나는 또 다른 종류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체는 무의식에서도 자기 중심적인 선악 분별과 선행 실천의 가능성을 만드는 곳이 된다.
무의식 세계를 청해 보는 곳인 잠자리는, 대낮의 행동방식과는 다르지만, 끊임없는 자기 긍정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무의식 세계에 저장된 인식능력을 확대해 보면, 그곳에서 인간은 ‘영원한 진리’ 혹은 ‘무한한 인간의 절대가치’에 대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의 확신이다. 복잡한 사건 현장인 신체 가운데 무의식 세계도 여전히 진리가 존재하는 곳이며 선행의 모체가 된다.
레비나스의 발상은 전형적 유대주의에 속한다. 즉 진리에 대한 결정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선악 판단의 기준도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율법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레비나스의 말대로 무의식 세계에도 인간의 선악판단이 지배한다면, 우리는 잠자리에서 자기중심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을 더 숙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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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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