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3-01-16 20: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자기 한계를 안다’는 오만함 !


‘자기 한계를 안다’는 오만함 ! 

가치(價値)란 어떤 사물이 지닌 의의나 중요성이다. 대상에 대한 설명과 이해, 해석과 평가를 내린 후에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에 가치를 강조하면 ‘대상 자체’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가치 정립의 이러한 성향은 인간의 지식에서 ‘순수한 대상’이나 ‘객관적 이해’를 더 이상 찾아서는 안 된다는 선언을 함의하고 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이러한 지식 형성 과정에 대해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물들에 집착하고 있다.” 집착은 인간의 욕망을 전제하며 모든 대상과 사물을 대하는 불가피한 정황이다. 대상을 파악하려고 시도할 경우 객관적이거나 중도적 입장에 선다는 태도는 애초에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욕망 전개의 방식에서 볼 때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배려와 선행은 자기 “욕망을 전적으로 만족시켜 줄 대상에 몰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욕망의 틀 내에서 일어난다면 욕망을 지닌 인간의 의지는 그 자체로 ‘선의지’가 된다. 선한 도덕적 의지가 다른 차원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욕망에 충실하는 것과 타인을 배려하는 도덕적 행위에는 차이가 없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보편적 욕망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본질적 사건’이라고 한다. 욕망이 지향하는 곳 이외에 어떤 다른 세계란 존재할 수 없다. 자기 내면에 이제까지 그려왔던 무수한 세계들은 잡다한 욕구 퍼레이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의 종국적 지점을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주전 384~322)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최고 존재’(신)라고 불렀다.
이렇게 가공할 ‘천국’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욕망은 비로소 행위의 종착지에 다다르며 평정과 안식의 순간을 누리게 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욕망의 집을 짓고 그 속에 모든 초월적 세계나 ‘존재 자체’를 철저하게 복속시킴으로써 ‘범(汎)세속화 도시’를 기획한다. 그래서 그는 시시하게 보이는 어떤 세계라도 그것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우선 즐거워하라고 한다. “대상은 나에게로 운명 지어져 있다. 대상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나의 욕망을 초월해서 따로 존재하는 세계란 없으며 오히려 나의 욕망 때문에 세계가 있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쯤에서 우리를 필연적 사회성으로 실존하는 ‘타인에 대한 존경’으로 이끌어간다. “타인은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을 통해 접근되고 주어질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경은 그의 권리와 특권에 대한 존경을 통해 나타난다.” 여러 가지 사회 체제들은 인간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취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에게 “사회성이란 적절한 몸가짐”이다. 그래서 자기 욕망에 대한 사회적 형식의 구체적 실현이 바로 아름다움의 실현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자기 욕망의 사회 질서에서 ‘수동적 멈칫거림’은 극복해야 알 ‘악행’이다. 레비나스는 사회성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재차 강조한다. “세계 안의 사회성은 소통(communication) 또는 공동체(communion)이다.” 소통의 여지가 있느냐가 공동체의 가능 조건이다. 공동체성에 대한 자각은 이타성이 지배하는 왕국을 위한 필수 요건이 된다. 그는 인간 문명의 질을 다시 평가하고자 한다. 서양의 자기 독단적 시각을 벗어나 소통에 필요한 적절한 몸가짐과 형식을 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레비나스에게 이타성에 기반을 둔 진심어린 소통으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선의지’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필연성을 외면하는 곳에 타자(他者)는 언제나 임자없는 도구로 무수하게 밟히고 유린당한다. 찰나의 통찰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깨달음은 타인과 더불어 사는 자신의 현실이 고맙고 만족스럽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이것이 또한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 동족 유태인 대학살을 처절하게 겪었던 철학자 레비나스에게 ‘타인을 보호하라!’는 탄식은 백 번도 공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더 몸부림치며 몸서리쳐야할 물음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대답을 들어야 하는 물음을 더 물어야 한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 

“여호와시여, 보시고 살피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습니까? 어찌 여자들이 자기들의 열매, 곧 자기의 귀여운 아이들을 먹어야 하며, 어찌 제사장과 선지자가 주님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해야 합니까? (애 4:20/ 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한 생각, 세계 지배욕 !
‘순간을 영원처럼 살라’는 망령(妄靈)의 속임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