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3-03-01 22:2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한 느낌, 신성(神性)에 대한 반항 !


예술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감각적 활동을 기교적으로 나타내는 행위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인간에게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는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대상의 본질적 의미는 훨씬 더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 자체는 예술 활동을 하는 주체에게 대상의 ‘이미지’만 남겨주기 때문이다.
사물에서 공통점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추상화(抽象化, abstraction)’라고 한다. 그런데 추상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본질의 불가피한 변형이다. 대상에 대한 해석과 조작은 불가피하며 본질을 운운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진다. 예술 활동에 담긴 불가피한 조작과 변형을 레비나스는 이미 주위 대상들을 낯설게 하는 ‘이국적 정서(exoticism)’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역, 84쪽. 이하 쪽수만 기입)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아무리 무한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이라도 이미 거기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술 활동은 왜곡되지 않는 본질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자신에게 속한 세계의 일부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우리의 세계로 여기려는 예술 활동은 허구 조작의 심각함만 더할 뿐이다.
세계를 발가벗기며 속속들이 그 내막을 드러내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세계와의 이질성만 증가시킨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이 상황을 정리한다. “예술 작품은 자연을 모방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멀리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85쪽) 다가가 더 분명하게 포착하면 할수록 더 빠져나가버리는 이 자기 모순의 활동이 예술작품에 들어나는 것은 냉혹하고도 처절한 진실이다. 스스로 만들거나 이미지화하는 그 미적 세계는 가장 추악하고 흉물스런 대상을 조작하거나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감각은 대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대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감각은 분명히 대상을 구성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 인도할 수는 없는 활동이다. 인간에게는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감각이므로 ‘내 감각’이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감각은 일반적으로 외부 자극을 지각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대상의 질서에 속박되거나 제한을 받지도 않는 것이며 인간의 단순하고도 무분별한 감흥도 아니다. 감각적 활동은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자체적 자기 전개 방식이 있다.
‘그 자체 살아있는 감각’이란 예술 활동의 근본 특성이 주관적 산물도 아니며 객관적 실재의 묘사도 아님을 부각시킨다. 주체의 능동적 활동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를 없애라고 종용하는 것이 감각이다.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능력이 감각이라고 하나 외부의 대상은 본래부터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일깨운다.
이렇게 감각에 의존한다는 것은 예술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결국 의식의 주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공감(共感, sympathy)’이라는 현상에는 모든 대상은 본래부터 나에게 낯선 ‘이국적 타자(異國的 他者)’라는 사실을 엄격하게 전제한다. 그래서 자기 기준대로 주제넘게 좋다/나쁘다 평가할 수 없다.
이처럼 공감의 요청은 감각을 통해 제시되는 대상과 주체의 근본적 차이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감각의 독립성은 예술적 공감의 주체가 나 자신일 수 없다고 거듭 자극한다. 감각의 주체가 나 자신일 수 없다면 무엇을 느끼며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입을 막는다. ‘잡혀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이라고.
엿새 동안의 만물 창조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다. 자기 작품에 대한 좋음/싫음의 평가는 ‘감각의 절대성’이 보장될 때 가능하다. 감감의 절대성은 상대적 존재로 만들어진 피조물에게는 불가능하다. 감각의 절대성은 적어도 대상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과 창조행위에 대한 절대적 만족, 그리고 창조목적의 일관성이 동시에 보장될 때 가능하다.
이는 인간이 풀 수 없는 과제다. 우리는 예술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은 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거나 볼 수 없는 영원한 신성함을 찬양하는 것과는 도무지 관계가 없는 진노와 심판의 처절한 과정(롬 1:19~20)일 뿐이다. 이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주시길 바랄 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처참한 고통, 신성(神性)에 대한 절망 !
한 생각, 세계 지배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