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3-04-11 22:0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깨달음을 위해 분발하자


子曰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자왈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일우 불이삼우반 즉불부야.

『논어』 「술이」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마음으로 애통하며 얻으려 하지 않으면 (그 뜻을) 열어주지 않으며, 입으로 말하여 표현하지 못하고, 사물의 한 부분을 드러내어도 그 세 부분을 돌이켜 증명하지 못하면 다시 알려주지 않았다.”

분(憤)은 “마음으로 통달하기를 구하나 얻지 못하는 뜻(心求通而未得之意, 심구통이미득지의)”이다. 비(悱)는 “입으로 말하고자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양(口欲言而未能之貌, 구욕언이미능지모)”. 계(啟)는 그 뜻을 열어준다는(開其意. 개기의) 의미다. 발(發)은 그 말에 통달한 것을(達其辭, 달기사) 말한다. ‘거일(擧一)’은 “사물에 네 귀퉁이가 있는 것은 그 한쪽을 들어 올리면(설명하면) 나머지 세 귀퉁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物之有四隅者, 舉一可知其三). 반(反)은 “돌이켜서 서로 증명한다”는 뜻이다(還以相證之義, 환이상증지의). 부(復)는 ‘두 번(再, 재)’을 가리킨다.

‘분’이나 ‘비’는 결국 제자의 안색과 말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자는 제자에게서 이렇게 진정한 배움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을 때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성실한 자세를 가졌을 때 가르쳐주고(擧一), 이를 스스로 반복하고 익혀서 그 삼(나머지)을 알 때,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배운 것을 통해 그 자신이 터득한 것이 있을 때(知其三) 그때 다시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제자들의 배움의 열정과 진심이었다. 이러한 열의가 제자에게서 나타났을 때 그의 배움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한꺼번에 전체 내지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제자의 이해의 단계에 따라 일부분을 먼저 가르치고 제자들이 스스로 터득하여 뭔가 얻은 것이 있을 때 다시 가르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제자가 혼자서 익혀서 그 내용의 전체를 증명해 내지 못하면 다른 것을 일러주기보다는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공자는 교육의 측면에서 보면 제자가 스스로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학습 능력을 존중한 것 같다. 제자가 좀 아둔해서 배운 바를 바르게 터득하지 못할 때는 더 많은 내용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즉 제자가 배운 바를 스스로 소화하고 그 배운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확대하여 그와 유사한 것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이를 교육의 측면에서 해석하면 공자는 자기 주도 학습을 통해 제자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교육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학의 공부 방법은 대학에 드러나 있는 대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 함께 섞여서 조화를 이루며 이론과 실제가 성장해 가는 것이었다. 모든 공부의 시작은 단순히 생각하는 데서나 실물이 없는 허망한 데서가 아니다. 사물 곧 경험을 중심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격물이다. 사물을 통한 경험이 쌓여갈 때 앎의 최고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공부의 외적 형식이다. 동시에 격물과 치지와 분리되지 않고 그 이면에서는 성의와 정심이 나란히 작동되며 수련되고 있어야 한다. 격물과 치지를 하는 모든 과정 안에 배우는 자의 진실한 뜻과 마음을 바르게 함이 함께 내재하고 있어서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 배움이란 천리 곧 하늘의 뜻을 알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 배움은 자연 만물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사태에 대하여 탐구하고 경험하는 것이 일차적이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탐구하고 경험해 나가면서 알아가야 한다. 이때 병행되는 것이 성의와 정심이다. 하늘의 이치는 하늘을 섬기는 진실한 마음과 변하기 쉬운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바르게 하늘의 이치를 받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의 작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데 다른 더 큰 하늘의 뜻을 알라고 일러주는 것은 의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더 깊고 넓게 하늘의 이치를 알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공자의 제자들에 대한 마음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 일부분이라도 마음으로 통하여 깨닫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떤 말씀을 배우면 이 말씀을 통하여 다른 말씀도 미루어 깨달아 가려고 힘쓰는 자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치와 뜻은 성경 안에 모두 계시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선 복음서 중에 한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읽으며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알아가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 하다 보면 그에 대한 깨달음이 있게 되고 이 깨달음으로 다른 복음서와 연계하여 알아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여전히 모든 사물이나 모든 사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변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경우를 통해서 깨달아진 하나님의 뜻은 주변의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으로 깨달음의 원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령의 깨우침으로 각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함께 깨닫고 실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각자의 깨달음이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협력하게 하여 선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깨달음이 그리스도인 각자에 따라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다. 깊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어떤 것이든 성령의 조명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필코 하나님의 뜻을 힘써 깨달아 알고, 그것을 입으로 표현(시인)하자. 그리고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자연의 소리: 비참한 인간을 대신하는 ‘곡소리’
쉰. 5-6세기 동로마 제국 교회의 비성경적 정통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