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자연의 소리: 비참한 인간을 대신하는 ‘곡소리’
비극이 음악의 정신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의 정신이 사라질 때 비극 역시 확실하게 멸망한다.
니체가 이해한 서양의 뿌리 곧 고대 그리스 정신은 인간의 비극을 이해하지 못하면 접근할 수 없다. 동시에 인생의 비극 즉 삶의 모순과 대립, 갈등과 쟁투의 영원한 반복은 반드시 논리적 언어가 아닌 음악의 방식으로만 경험과 표현이 가능한 운명이다. 삶의 비극과 음악의 정신은 내면적으로 동일한 본질이지만 외견상 표현의 상이함일 뿐이다. 니체는 이러한 명제를 통해 고대 서양의 기원 곧 그 뿌리를 추적하고 있다. 형이상학을 일반적으로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학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음악의 방식이 아닌 언어의 형식 논리가 작동한다. 즉 참인 명제와 거짓 명제가 선명하게 나누어진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은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존재의 근원을 추적할 때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규범이다. 언어 논리는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경우를 용납하지 않는다. ‘니체는 거짓말쟁이다’는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에 반드시 하나만 진리다. 형이상학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식 논리적 명제를 사용해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방식의 기원 탐구가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그릇된 본질 탐구 방법을 확산시킨 주범이 바로 소크라테스라고 맹비난을 쏟아붓는다. 인간 내면에 진리를 향한 깨끗한 양심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양심이 인간의 이성적 활동을 항상 뒷받침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조작해 유포한 간교한 자가 바로 소크라테스다. 삶의 근본을 도덕적 선악 판단으로 접근하는 태도에는 처음부터 삶의 진실을 비틀어 놓고 시작하겠다는 매우 ‘악의적’ 심산(心算)이 깔려 있다. 니체는 이처럼 전통 철학자들이 쉽게 간파할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의 간계를 ‘보았던’ 것이다. 서양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사상을 마치 종합적으로 수렴하여 서양의 지적 전통을 수립한 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인간 삶의 본질을 망쳐 놓은 자인가를 폭로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적 양심에 근거한 진리 주장을 만들어 내는 형식 논리 그 자체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삶의 근본은 형식 논리로 담을 수 없는 모순과 갈등, 대립과 쟁투의 무질서임을 재차 강조한다. 나아가 이러한 비극적 삶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언어 논리가 아닌 ‘음악’을 그 담지자로 추천한다. 그래서 니체는 음악을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숫자와 비슷하다. 즉 모든 가능한 경험 대상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것에 선험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가능한 모든 노력, 흥분과 의지의 표출, 즉 이성이 부정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이 무수히 가능한 선율 속에 표현된다.(123)
참과 거짓이 선명한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보면 부정적이고 애매모호한 표현 방식인 음악이 오히려 비극적 삶의 본질을 모두 담아낼 수 있고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음악의 본래 정신에는 비극을 닮을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참과 거짓, 선과 악이 본래부터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욕과 의지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정신을 구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음악이지만 동시에 비극적 인간의 의지와 감정의 흥분을 통제하거나 규격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극적 감정의 미묘한 면을 선율 속에서 담아내고자 하지만 영원한 진리로 둔갑시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음악과 비극 예술의 상징인 디오니소스 신화를 니체는 이렇게 정리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개체 원칙의 배후에 있는 전능한 의지, 모든 현상의 피안에서 모든 파멸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한다. 비극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의 기쁨은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형상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127)
니체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려면 조건이 있다. 반드시 영원한 파멸을 감내하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 생명과 파멸의 무한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추진력을 니체는 의지의 전능성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비극적 의지를 어떤 구체적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비극적 의지의 발동은 그 자체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생명력의 영원한 반복이며 가장 진실하게 삶을 긍정하게 하는 모체(母體)다. 니체는 인간의 비극적 의지와 자연의 소리가 교감하는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에서, 그리고 그것의 비극적 상징에서 동일한 자연이 꾸밈없는 진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나처럼 되어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화에서 영원히 창조적이고, 영원히 실존을 강요하며, 이 현상의 변화에 영원히 만족하는 원초적 어머니인 나를!’(127)
그런데 니체는 삶의 본질로서 비극을 보면서도, 변화에 영원히 만족하라는 자연의 진짜 목소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우선 자연 만물을 진화의 산물로 보는 관점으로는 결코 자연의 ‘참비명’을 들을 수 없다. 즉 창조주를 모르면 자연의 뿌리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연의 목소리가 인간의 비극에 대해, 공명(公明)으로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곡소리를 낸다는 것을 모른다. 해명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인간 의지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자연의 진정한 목소리는 인간이 결코 해방될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자연의 ‘곡소리’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바울이 알려주는 자연의 탄식 상황에 다시 주목한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22)
<241호에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타인 배려의 예절 |
깨달음을 위해 분발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