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속물이 교양으로 둔갑하는 문화에 대한 니체의 비판 2
교양의 속물이 자신의 약함을 고백할 때 그의 강함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고백하면 할수록, 냉소적으로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가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얼마나 우월감을 느끼는지가 점점 더 명료하게 밝혀진다. 속물들이 냉소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시대다.
니체의 초기 사상에 나타난 특징이라면 생생한 삶과 그 현실을 도덕적으로 포장하여 선과 악으로 포장하려는 사상(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 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고대 문헌학 전공자인 철학자 니체에게 주된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옛 사상가들의 특징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도덕적 감정에 호소하면서 인간의 삶을 선과 악으로 조작하려고 했던 예술가들, 철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이다. 특히 뿌리도 빈약한 18-19세기 독일인들의 지적 정서에 마치 교양인처럼 침투하는 아카데믹한 활동을 흉내 내는 지성인들이야말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이들을 통칭하면 ‘교양의 속물’이다. 니체가 듣기에는 분명 빈 깡통 소리의 경멸스러운 소음인데 대중들은 자신의 교양을 살찌우는 지식과 지혜로 착각한다. 이렇게 교양이라는 이름의 속물이 강한 영향력을 미칠 때 그곳에는 반드시 공허한 진언(陳言)이 허섭스레기처럼 난무하게 마련이다.
니체는 자신의 시대에 드러난 신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교양 증가가 단지 자신과 자기가 속한 문화가 속물임을 고백하는 것이 전부라고 혹평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나사렛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규정하려는 당대 독일 신학자들에 대해, 니체는 그들의 교양이 철학적 소양을 거의 갖추지 못하는 천박한 지식의 난봉꾼과 같다고 비판한다. 교양이라는 말에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려는 니체는 무엇보다 양적으로 늘어나는 다양한 지식의 무질서한 축적(蓄積)을 무엇보다 경계한다. 특히 인간의 비극을 담아내는 비극 정신을 왜곡하거나 간파하지 못하는 사상에 대해 최소한의 자비도 없는 혹독한 비평을 쏟아붓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서양 사상의 근본을 왜곡하고 서구 정신의 뿌리마저 난도질했던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로 규정하려는 태도에서 니체는 주어진 인간의 삶은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그리고 미와 추, 행과 불행으로 분리해 고정시키려는 이분법적 태도를 그야말로 증오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실을 하나의 통일된 비극 구조로 파악하고자 하는 니체에게 교양을 운운하면서 함부로 야만을 조작하는 행위야말로 용서의 여지가 없는 중대 범죄자들이며 빨리 사라져야 할 실패한 진화의 산물이다. 그래서 니체가 당시 독일 문화를 ‘속물들의 냉소적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때 이는 삶의 증진이 아니라 삶의 죽음, 문화의 죽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왜곡하는 교양은 반드시 확산하고 보편화한다는 사실이 니체에게는 슬프지만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다음은 신학과 철학 지식의 증가, 역사주의와 천박한 예술의 확산이 종교적 광신으로 치닫고 있는 게르만 문화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다..
미래 종교의 창시자로서의 속물 (……) 광신자가 된 속물 - 이것이 바로 우리 독일의 현재를 특징짓는 전대미문의 현상이다. (……) ‘능력이 없는 광신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정말 위험한 사람들이다.(204-05)
문화의 확산은 반드시 종교적 광신으로 탈바꿈하며 이는 이내 광신자 집단을 만들어 낸다. 전대미문의 현상으로 비치는 당대의 독일 문화와 그러한 교양의 광신적 특성은 어쩌면 다음 세기에 발발한 게르만 전체의 비극에 대한 예언처럼 보인다. 이미 어떤 이념과 종교에 함몰당해 판단력을 잃고 맹신자가 된 경우를 광신자라고 한다면 어떤 절제력도 사라진 이 광신자야말로 삶의 근간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자들이다. 철학과 신학의 다양한 정보를 통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나름대로 개념을 구조화하는 활동이 결국 교양의 속물을 만들고 그 확신이 더할수록 광신자가 되는 과정은 지식을 축적하는 모든 인간이 빠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함정이다. 물론 니체는 자신을 포함시키면서 이러한 사실을 자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속물 교양인들을 구더기에 비유한다.
송장은 구더기에게 멋진 생각이고, 구더기는 모든 생명체에게 끔찍한 생각이다. 구더기들은 비만한 몸 속에서 천국을 꿈꾸고, 철학 교수들은 쇼펜하우어의 창자를 파헤치는 일에서 천국을 꿈꾼다. (……) 슈트라우스적 속물은 우리의 위대한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 속에서 벌레처럼 살고 있다. 이 벌레는 파괴하면서 살아가고, 먹어치우면서 경탄하고, 소화하면서 숭배한다.(218)
구더기의 행복감이 증가할수록 그 끔찍함은 더욱 커진다. 신학적 교양이 더할수록 천국을 꿈꾸지만 바로 그곳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절벽이 될 수 있다. 온갖 철학적 수식어를 동원해 쇼펜하우어를 해석하고 공감하지만 송장 속 구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당대 이러한 속물적 교양을 유포시키는 자로 『예수 평전』을 저작한 당대 신학자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를 지목한다. 니체는 슈트라우스에 대해 독일 문화를 마치 시체 속에서 우글거리는 구더기로 만들어 버린 천박한 문화 퇴폐주의자로 규정한다. 철학자와 신학자, 시인과 음악가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 슈트라우스의 종교적 자기 고백은 최악의 문체로 조작된 저질적 교양물이다. 니체 초기의 이러한 문화 비판은 삶을 이분법으로 나눈 원조 격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비판의 연장이다. 이러한 교양 문화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니체 사상의 뿌리와 그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문화를 전면 거부하고 이 땅에서 우리의 몸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니체의 고민과 몸부림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삶을 오염시키는 구더기와 같은 문화를 아무리 정확하게 간파하더라도 니체 스스로 그러한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신도 자각했으리라 본다. 자신을 아무리 통찰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몸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혹은 송장에서 뒹구는 구더기’임을 아무리 철저히 자각하더라도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 자신의 몸부림으로는 시체에 뒹구는 살찐 구더기 신세에서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절대자를 믿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가능성은, 니체를 통해 볼 때, 그 속에 어떤 씨앗도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음을 절감한다.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벧후 2:12/강조는 필자에 의함)
<249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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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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