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신(神) 복제 공장: 유비쿼터스 세계
현대사상의 속내를 분명히 내비친 개념이 있다면 ‘죽음’일 것이다. 이 잔인한(?) 개념은 우선 신을 목표로 하더니 국가를 지나 인간 그리고 텍스트까지 연쇄살인의 난동을 부리고 있다. 서구에 일어났던 어떤 전쟁보다도 끔찍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이 죽음의 퍼레이드는 특정한 의미와 가치체계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더 이상 찾지도 말라는 경고다. 이러한 상황에 거론되는 허구적이지만 도피하고 싶은 공간이 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다.
유비쿼터스는 라틴어로 ‘신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이다. 신의 속성인 전지전능과 무소부재(無所不在) 가운데 후자를 강조한 용어다. 유비쿼터스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만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는 맥락은 전혀 다르다. 우선 그 배경에는 신의 죽음이 깔려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창조주였던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세계도 없애버리고 훨씬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것이다.
유비쿼터스 공간은 어떤 초월적 규범이나 지배적 권위가 없어도 인간들 스스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대광역의 영토다. 시공을 초월해서 동시에 편재하겠다는 가상의 공간(cyberspace)이다. 이 개념에는 창조주에 의한 피조물의 보존과 같은 뉘앙스가 전면 거부된다. 그리고 순전히 조작된 인위적(artificial) 합성물이지만(synthetic) 실제와 다름없거나(virtual)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로 각인되어 현실에 더 철저하게 침투하여(pervasive) 정복지를 한없이 넓혀가고 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플러스 울트라(plus ultra)’의 세계가 유비쿼터스 세계다. ‘점점 더! 점점 더!’하며 영토 확장에 미친 자들이 이미 외쳤던 구령과는 비교되지 않을 야욕이 서려 있다. 시간 차원에서는 전우주의 동시성을 강조하고 공간 차원에서는 무소부재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자 한다. 유비쿼터스 세계가 목표로 하는 것은 신이 죽어 묻힌 땅 위에 인간이 원하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의 융합으로 만들어진다. 시간으로 보면 광속도가 지배하므로 공간적으로 거리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위성정보 시스템의 발전은 가상공간과 우주공간의 거리마저 없애고 있다. 이러한 지구공동체의 다른 이름은 ‘정보통신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동체의 넓이는 한계를 헤아릴 수 없으며 인구도 수십억인지 수백억인지 얼마나 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리고 누가 지배자이고 피지배자인지, 누가 주인이며 종인지도 모른다. 진/위, 선/악 그리고 미/추, 행/불행의 기준은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급진적인 디지털 예술가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흐려놓으려 한다. 이른바 ‘에고 머신(ego machine) 프로젝트'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사이버 세계에서는 여전히 살아서 정보통신 공동체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생사(生死) 결정까지 하는 유비쿼터스 세계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본래의 의미가 이제는 ‘인간에게 필요하면 하나님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뜻하게 되었다. 니체에 의해 그 죽음이 선언된 하나님을 이제 인간들은 유비쿼터스 디지털 공장에서 필요한 만큼 만든다. 온갖 잡동사니 우상을 원하는 만큼 대량 생산하듯이 이제 하나님은 필요한 놈이라면 누구라도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창조주의 권한은 이제 유비쿼터스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하는 자들이 넘겨 받게 되었다. 이 가상세계에는 주인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신의 행세를 하는 꼴이 될 것이다.
한 예로 철학 사상은 물론이고 서양의 신학 사상까지 이러한 공간에서 ‘생물학’적 복제품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를 들 수 있다. 이른바 ‘통섭(統攝, consilience)’을 주장하는 자(대표자로 에드워드 O. 윌슨이며 그의 저서명이 통섭임)들이다. 통섭이란 서로 다른 요소나 이론들을 생물학적으로 조합하여 새로운 진화의 생명 단위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장하는 자들에 따르면 도덕과 예술, 철학과 신학은 진화 생물학의 산물이 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 문화들을 골수의 진동과 뇌 물질의 운동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의해 이미 인간의 모든 미래가 결정될 뿐만 아니라, 신학은 최고의 정신 학문이 아니라 진화의 하급 단계인 ‘석기 시대의 상식’ 정도에 불과하다.
창조주가 오래 전에 죽어버린 세계, 그러나 이제는 원하는 만큼 그 신을 대량생산해 ‘세계복음화’라는 성장논리를 앞세워 ‘교회’ 점포로 직송해 빠르게 유통시키는 세계,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영원자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할 때마다 무슨 이유로 무엇이 갈급하여 부르고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다스려주시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삿21:25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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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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