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쉰. 5-6세기 동로마 제국 교회의 비성경적 정통성
451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인근 칼케돈(Chalcedon)에서 황제가 소집해 유명한 공의회가 열렸다. 황제의 주관으로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한 교리를 확정한 칼케돈 신조가 마련된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 완전하고 인간성에 있어 완전하며 참 하나님이고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를 가진 참 인간이다. 그의 신성에 관한 한 아버지와 동일본질이고 그의 인성에 관한 한 우리와 동일본질이다.” 이 신조로 인해 두 입장은 이단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를 따르는 단성론과 양성론적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정죄받는다.
그런데 황제가 내린 종교적 판결은 황제 당대에는 유효할지 모르나 다른 황제가 즉위하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단으로 정죄했던 것이 다시 정통이 되고, 정통이라고 공포했던 교리가 이단이 된다. 이단으로 정죄 받으면 관련자들은 추방은 물론 처참하게 도륙당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신학적 견해 차이가 정통과 이단으로 비화하였고 결과는 집단 학살과 같은 참극을 야기했다. 이러한 살육의 현장에서 성경의 진리가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섭리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정치와 종교의 착종과 타락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며, 성경권위 회복은 이로부터 천년을 기다려야 하며 그 과정의 유럽 교회사는 암울한 역사가 이어진다.
410년 서로마 제국이 야만족에게 점령당하면서 서로마의 영광은 쇠퇴와 몰락의 길을 간다. 상대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교황들은 그 권위가 더욱 커진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황제 제노(Zeno)는 이전에 이단으로 정죄했던 단성론(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다고 봄)을 다시 옹호한다. 이는 로마 교회와 갈등을 야기했으며 양성론(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할 수 없다고 봄)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다시 정죄를 당했다. 단성론에 집착했던 제노 황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고자 애썼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무엇인지보다는 황제든 교황이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황제는 서로 대립하는 신학 이론을 통합함으로써 명실상부 제국의 황제임을 확정하려고 했고, 감독들은 (제국으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한 재정적 지원을 서로 차치하고자) 다른 교파는 물론 황제까지라도 정적으로 삼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과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목적은 자신의 이권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황제든 성도들이든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들의 부와 이권에 개입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자들이 당대부터 지금까지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이다.
당시 5세기 말부터 6세기 중엽까지 동로마제국을 통치했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482-565) 황제의 황후 테오도라(Theodora, 500-548)는 단성론파의 열렬 지지자였다. 그래서 그 교리를 동남쪽의 왕국으로 전파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황후는 “단성론 대립 문제와 제국 권력의 위협을 억제하려고 했다.”(375) 큰 틀에서 보면 기독교의 전파이지만 어떤 기독교를 전파했으며, 왜 전파하고자 했는지를 살펴보면 비판의 여지는 적지 않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국 교회의 절대표지가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점점 세속적 권력이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후 테오도라 당시 시리아 에데사의 주교였던 인물이 있다. 야콥 바라데우스(Jacob Baradaeus, 543/544-578년 동안 에데사 주교로 재직)였다. 그는 시리아 단성론 교회를 설립했으며 이들은 야콥파 교회로 불렸다. 이들은 예배 의식 중간에 칼케돈 공의회 이전 자신의 정통을 수립한 교부들을 기념하는데 그때 ‘고상하고 굳건한 탑’으로 숭배하는 교부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이다. 동방으로 교세를 확산한 시리아 단성론파 교회는 수도사와 수도원 중심의 종교 생활을 이어갔다. 요새처럼 탑을 완비한 수도원을 건축했으며, 이후 이슬람의 침공으로 거의 상실되었으나, 지금도 잔존하는 곳들이 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바로 정통의 증거이며 상징이고 진리의 표상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순교한 자들에 대한 성인 숭배는 이들 정통 유지의 결정적 아이콘이다.
동로마 제국 교회 당시 당대의 많은 감독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막대한 부를 누리기 위해 현실과 타협한다. 그 예가 당시 예루살렘 감독 유베날리스였다. 그는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 단성론파를 지원했다. 하지만 칼케돈 공의회 때 변심해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교리를 편리에 따라 선택했다. 처음에는 비타협적인 알렉산드리아 단성론을 따랐던 게오르기아(조지아) 교인들은 두 세기가 지나면서 양성론을 주장하는 칼케돈공의회 결정으로 돌아선다. 현재 동방 정교회 내의 국가별 다양한 종파들은 5-6세기 당시의 종교적 견해에 그 기원을 둔다. 중요한 점은 진리와 정통의 기준이 성경진리가 아닌 어떤 인물의 사상에서 그 원천을 삼는다는 점이다. 또는 정교하게 다듬은 십자가상이나 특별하게 작곡한 찬송시에 정통의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하나님의 말씀 절대진리 수호가 아닌 자신의 권좌와 부와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이곳저곳의 눈치를 보는 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불사하거나 혹은 다른 종파를 학살하는 이러한 행태는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하는 하나님의 심판임이 분명하다. 순수한 진리의 말씀만을 바르게 지키고 준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과 은혜뿐이다.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240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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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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