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중용은 최고의 덕인가
子曰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자왈중용지위덕야 기지의호 민선구의.
『논어』 「옹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중용의 덕이 지극하구나. 사람들이 (이 덕을 소유한 자가) 적은 지가 오래되었다.’」
중(中)은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이른다(無過不及之名, 무과불급지명). 용(庸)은 평균 되고 항상 한결같은 상태(平常, 평상)를 말한다. 지(至)는 극진함이다. 선(鮮)은 적음(少)이다. 사람들(民) 중에 소수만이 이 덕을 지니고 있는데 그마저도 오래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편 정자(程子)는 중을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不偏之謂中, 불편지위중). 용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不易之謂庸, 불역지위용). 그는 중을 ‘천하의 바른 도(길)’(天下之正道, 천하지정도)로 보았고, 용은 천하의 정해져 있는 도리(天下之定理, 천하지정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세상이 중용을 가르치는 것이 쇠퇴하여서 사람들이 그것을 행하는 일이 흥왕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수의 사람만이 이 덕을 지니게 되었고 그나마도 이런 상황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용은 사람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람이 신체와 마음(또는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중용이 몸과 마음의 면에서 모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몸은 동물의 경우에서도 확인되지만 그 자체로 중용을 유지하고자 하는 특성이 있다. 몸은 피곤하면 쉬려고 하고, 몸 안에 열이 있으면 그것을 몸 밖으로 내보내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려고 한다. 과식을 하면 불편함을 느끼면서 등을 통해 평소의 균형을 이룬다. 사지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중용을 지키는 것이며, 언제나 몸의 정해져 있는 원리를 따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 자신이 몸의 사용을 한쪽으로 쏠리거나 균형을 무너트릴 때 몸의 중용이 무너지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몸과는 좀 다르다. 사람이 의식해서 훈련하지 않으면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일쑤이고 외부의 사태에 쉽사리 지나치게 반응하거나 지나치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의 마음은 결코 일정한 정해져 있는 이치에 따라 순조롭게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도 자주 바뀌어서 도대체 마음의 정해져 있는 이치가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심리학(心理學), 곧 ‘마음의 이치’에 대한 학문이 과연 객관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마음의 실상을 밖에서 사람이 규정해 넣는 형식으로 학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유학에서는 맹자의 성선(性善, 성은 본래적으로 선하다)을 주장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이 선하게 쓰이도록 만드는 정해져 있는 이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성선의 이치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용은 거의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셨다. 선악과를 따 먹느냐 먹지 않느냐이지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이지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용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가 될 뿐이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그 역사하심과 비교할 때 중용이라는 것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는가. 중용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셨으며 택한 자녀를 향한 사랑의 드러냄 이외에 무엇 하나 관여된 것이 없다. 중용은 그렇게 우리 구주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정은 동시에 그의 형제요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의 믿음이 오락가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중용이 나름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즉, 오직 바른 신앙의 토대 위에서 중용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늘 한결같고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는다’ 뜻으로 이해될 때에만 의의를 지닌다.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고, 요리조리 바뀌거나 하지 않고 평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러한 중용의 믿음은 참믿음의 증표 중에 하나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중용의 기준을 세우고자 한다면 오직 한 분 그리스도뿐이다. 성도들의 몸 전체와 마음과 생각과 혼과 정신의 일체의 움직임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지나침도 모자람도 한편으로 편향되지 않으면서 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지나침이든 모자람이든 편향됨이든 변하지 않음이든 그 심판자는 세상의 논리나 준거가 아니라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그 은혜 안에서 성령의 인도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택하신 자녀들을 이미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성도는 자신이 중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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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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