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마흔일곱.성경권위 회복의 실마리: 교리(dogma) ‘구조’에서 성경 ‘강론’으로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4-48)
인용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이 땅에 계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핵심 사역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구약을 강론하시면서 구약에서 언약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모두 성취되었음을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는 사역을 하셨다. 자신이 고난받으며 죽고 부활한 것은 구약의 언약에 대한 성취 사건임을 확증하신다. 또한 다시 구약에 근거한 약속을 해 주신다. 예루살렘부터 세상 모든 족속에게 죄 사함을 위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며 그 사건이 성취되는 동안 제자들은 구약의 말씀을 그리스도처럼 강론하면서 언약대로 이루어진 성취의 역사를 전하는 증인이 될 것도 언약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 성취된 역사적 사건을 전하는 일 곧 성경을 ‘강론’하는 증인의 사역, 이 본보기를 그리스도는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이는 장차 아버지와 그리스도 자신이 보낼 성령이 오셔서 주관하실 것도 약속한 바 있다.(요 14:26; 15:26 참조) 즉 진리의 영인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하실 사역이 바로 사도들과 모든 진리의 동역자들이 성경을 올바로 ‘강론’할 수 있도록 주관하시는 일이다.
우리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는 ‘성경강론’ 중심의 교회가 아닌 것이 태반이다. 헌법에는 교회의 표지가 말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는 주일 아침에 기본 교리(敎理, dogma)에도 미치지 못하는, 진리 요건의 기초에 해당하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채, 율법적이거나 도덕적인 설교 일색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상황이다. 표지를 상실한 채 성경 강론은 사라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성경 권위가 점점 사라지는 세속적 집단으로 변질하는 상황에서도,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성경은 펼치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는 텍스트 정도로 여기는 매우 그릇된 시각도 큰 문제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이며 그 말씀의 선포는,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그리고 사도들이 모범을 보인 것처럼 ‘성경을 강론’하는 것이 근본이고 기본이다. 하지만 멀어져도 너무 멀어졌다. 신학교에서 성경공부를 요구하자 ‘신학교는 성경학원이 아니다’라는 말은 오래전 옛말이 되었다. 어떻게 성경강론에 기초를 두지 않는데 올바르고 건전한 신학이 수립될 수 있다는 말인가? 신학교를 10여 년 다니고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회당에서 하신 것처럼, 사도들이 곳곳에서 강론한 것처럼 강론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절대진리로 확증하면서 안내하는 지도자들이 너무나 빈약한 것이 한국 교계뿐 아니라 세계 교계의 상황이다.
강론은 헬라어 디알레고마이(dialegomai)가 어원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문법적인 기초 정보를 제공하는 데서 시작하여 이에 대해 물어보고 재차 확인하는 대화와 토론(discussion)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 교회 문화에서 목회자와 성도가 이러한 ‘강론’ 방식으로 교육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아마 수십 년 전 고약한 레토릭을 다시 인용할지 모른다. ‘교회는 목회하는 곳이지 성경학교가 아니다’라고. 디알레고마이는 신약성경에서 13회 등장하는데 진리 전달 방식과 진리 내용 자체를 모두 포괄한다. 히브리서 12장 5절에는 말씀을 ‘권면하다’는 뜻으로 나온다. 이는 얼마든지 성경을 강론하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논쟁이라는 방식과 관련해서는 마가복음 9장 34절과 유다서 1장 9절에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성경을 ‘강론하다’(행 17:2; 18:4; 19:8-9; 20:7,9; 24:25; 28:23)라는 뜻에 집중해 있다. 사도행전을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건으로 보면, ‘교회 설립=성경 강론’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우리 언어로 강론(講論)은 ‘학술이나 도의(道義)의 뜻을 해설하며 토론하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디알레고마이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설교와 강론은 본질 면에서 구별된다. 본질적 구분은 근본적(radical) 문제와 직결한다. 교회가 성경강론 서원(書院), schole, 행 19:9)이냐 목회지냐의 본질적인 심각한 물음이다.
그런데 설교의 원천을 들여다보면 설교는 ‘성경강론’이 아닌 특정 교리(敎理, dogma)에서 비롯한다. 엄격히 말하면 도덕적이거나 율법적 설교는 기초 교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정도 진리 논증의 명확성을 띠는 설교는 교리 체계에 그 연원을 둔다. 교리라는 말도 성경에 등장한다. 로마 황제의 명령(눅 2:1; 행 17:7), 단지 문자로 기록된 모세의 율법조문(엡 2:15; 골 2:14) 그리고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정 사안(행 16:4)으로 분류할 수 있다. 빈도로 보면 성경강론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용어가 교리다. 그리고 맥락으로 볼 때도 복음과 상반된 뜻이다. 로마 황제의 명령이나 유대인들이 고집하는 율법의 조문을 일컫는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방 성도들에게 작성한 네 가지 권고 사항의 규례(행 15:29)는 근본은 성경강론에 바탕을 둔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초대 교회의 절대 유일의 표지는 ‘성경강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리의 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르는 중세 스콜라신학의 학적 편집의 인위적 구조가 원천이다. 이른바 서론-신론-인간론-기독론-교회론-구원론-종말론(벌코프의 교리사 구조는 삼위일체론-기독론-죄론과 은혜론-속죄론-구원론-교회론과 성례론-종말론임) 구조다. 성경의 구조와는 사실상 거리가 멀다. 더 선명하게 강조한다면, 서두에서 인용한 성경본문에서도 보듯이, 성경 본문을 따라가면 신론부터 종말론까지 모두 나온다. 즉 성경강론이 먼저다. (성경강론의 우선성이 성경신학이냐 조직신학이냐의 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신학도 성경 전체의 논리적 일관성과 구조적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부분 연구에만 집중한다면 조직신학의 한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의 순서대로 강론하신 것처럼, 사도행전에 명시된 대로 사도들이 그렇게 성경을 강론한 것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강론을 하지 않으면 교회 표지가 말씀이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교회의 유일한 표지는 전통적 교리 곧 ‘도그마의 구조’가 아니라 ‘성경의 강론’을 따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행 19:9);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23)
<234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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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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