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6-03-31 17:1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일흔 다섯. 클로비스의 메로빙거 왕조: 로마 가톨릭 제국의 바탕(2)


서방 기독교 역사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 붕괴는 동·서 기독교와 그 정치 질서가 분열의 길을 걷는 역사적 전환기를 도래하게 한다. 그런데 이 무렵 480년경(5세기 말)부터 550년경(6세기 중엽)까지 그 당시 게르만 왕국 형성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세력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클로비스(Clovis I, 약 466–511)라고 한다. 클로비스 1세는 프랑스의 기원인 프랑크족 왕이었으며 6세기 중엽 이후 서유럽 기독교 질서를 결정적으로 바꾼 인물이기도 하다. 게르만계 부족인 프랑크족(Franks) 출신으로 현재 프랑스 지역인 북갈리아에서 프랑크 왕국(481–511)의 통치자였다.

그는 여러 부족으로 분열된 프랑크족들을 통일하여 서로마 제국 붕괴 후 서유럽 최초의 강력한 게르만 왕국을 수립한다. 그런데 교회 역사와 직접 관련해서 중요한 사건은 클로비스의 개종 사건이다. 그의 신앙은 본래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고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며 동방 신학에 맞섰던 왕들처럼 아리우스주의자였다. 그런데 그가 니케아 신조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본성상 차등이 없다는 니케아 신경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는 당시 게르만 왕 중 거의 유일하게 로마 가톨릭을 선택한 왕이었다. 이 결과 혹은 향후 그 여파로 인해 서유럽 국가의 구조는 세속의 왕권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결합하는 그야말로 ‘기독교 국가’ 크리스텐둠(Christendom)으로 전환되어 16세기까지 천년제국의 토대를 확립한다. 당연히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은 서구에서 매우 강력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으며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메로빙거란 그의 조상 메로베크(Merovech)에서 유래함]의 창시자가 되어 로마 가톨릭의 세력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클로비스는 결국 사도 바울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건립된 ‘로마 교회’가 세속과 종교를 통합해 성경 권위에서 벗어난 정치-종교 세력인 ‘로마-가톨릭’으로 변질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향후 약 1,300년 동안 프랑크 왕국의 군주들은 ‘클로비스’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는다. 또한 이제부터는 로마 가톨릭은 동방 황제의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서방 통치 체제의 질서를 다시 확립하고 천년 로마의 영화를 다시 누리려는 야심을 구체화한다.

그런데 메로빙거 왕조는 자신들이 수용했던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성론에 바탕을 둔 신앙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이 날조한 성인 숭배 사상에 기초를 두게 된다. 다시 말해 기독교를 표방하는 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성경진리에서 벗어나 성인 숭배 사상 즉 우상 숭배에 기초한 왕국으로 변질시킨다. 이 프랑크 왕조는 세 명의 성인 숭배를 통해 왕권을 정당화한다. 투르의 마르틴(Martin of Tours), 레미기우스(Remigius of Reims) 그리고 유누비에바(Genevieve of Paris)이다. 이 성인들을 도시와 왕국의 보호자로 숭배했으며 ‘성인’은 프랑크 왕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중보자 역할을 하는 우상 숭배의 대상이다. 투르의 마르틴은 왕국의 보호자이며 군사들의 성인이다. 그의 유해를 투르 대성당에 두고 대규모 순례가 일어나도록 했다. 전쟁이나 질병, 여행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며 마르틴에게 도움을 청한다. 11월 11일이 그 축제일이며 왕국의 공식 의례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클로비스를 비롯해 후대 프랑크 왕들이 전투에서 승리할 때 이들은 그 공을 마르틴에게 돌린다. 자기 스스로를 ‘우리는 마르틴이 지지하는 왕국’이라며 마르틴을 우상화했다.

유누비에바는 도시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숭배했다. 파리의 보호자로 숭배하는 이유는 파리에 훈족이 침입할 당시 그녀의 기도가 도시를 보호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451년경(5세기 중반) 훈족의 왕 아틸라가 갈리아(현재 프랑스)를 침입했다. 훈족의 공격 목표가 파리(루테티아)가 아니었으므로 파리는 직접 함락당하지는 않았지만 파리 시민 역시 위협을 겪었고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와 서고트 연합군이 훈족과 싸워 승리하면서 갈리아에서 훈족은 철수한다. 이 역사적 전투를 로마 가톨릭은 유누비에바의 기도로 승리했다는 이야기로 변질시킨다. 유누비에바가 파리 시민들에게 ‘도망가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면서 금식하며 기도하게 하고 평안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족이 파리에서 떠난 이유는 유누비에바의 중보 사역이 결정적이었으며 이후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그녀의 유해를 들고 행진하게 된다. 이렇게 성당 특히 성당의 무덤이 도시 신앙의 중심을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클로비스와 그 왕족들에게 유누비에바는 왕의 통치 행위에서 영적 권위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파리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유누비에바가 지키는 도시’가 된다.

그리고 레미기우스 숭배는 프랑크 왕들의 왕권 정당화에 토대가 되었다. 레미기우스는 클로비스 세례의 집전자였다. 레미기우스(약 437–533)는 프랑크 왕국 초기 교회 핵심 지도자였으며 랭스(Reims)의 주교였다. 갈리아 지역 가톨릭 주교였으며 니케아 정통을 대표했다. 그는 당시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왕권과 교회를 연결하면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질서 수립의 핵심 역할을 한다. 결정적 사건이 496년경(또는 498년경) 세례 사건이다. 레미기우스가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단지 개인의 회심이 아닌 (아리우스주의에서 니케아 정통으로) 국가 전체가 개종하는 사건으로 규정했다. 당시 레미기우스가 클로비스에게 유명한 말이 있다고 전한다. “겸손히 머리를 숙여라, 시캄브리인(프랑크인)! 네가 불태우던 것[니케아 정통-필자 주]을 경배하고 네가 경배하던 것[아리우스주의-필자주]을 불태워라.”(《프랑크인의 역사》 제2권) 이렇게 가톨릭과 국가가 결합하면서 기독교 국가 체제 크리스텐둠(Christendom)이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왕권의 정당성은 교회의 권위 아래 있으며 이후 왕에게 세례를 준 기름은 하늘에서 내려온 기름이라고 날조한다. 이러한 의식 절차에서 교회의 유일 지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 진리는 온데간데없다. 교회는 물론 이 세상의 창조자이며 유일한 통치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도 사라진다.

우리는 여기서도 다시 한번 절대진리 하나님 말씀의 신적 권위를 확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288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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