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4-09-03 11: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역사적 인간의 고칠 수 없는 세 가지 병 I


역사는 행동하고 추구하는 자로서,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로서, 고통 받고 해방을 요구하는 자로서 살아 있는 것에 속한다. (……) 역사의 기념비적 방식, 골동품적 방식, 비판적 방식

니체는 인간의 성품과 욕구를 셋으로 분류하면서 이를 역사에 적용하여 역사 이해의 세 가지 관점을 만든다. 먼저 현실 상황을 뛰어넘어 위대한 것을 남기고자 행동하는 성향을 ‘기념비적 방식’에, 현존재의 보존에 몰두하려는 ‘골동품적 방식’에 그리고 과거 유산을 해체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성향을 ‘비판적 방식’에 관련짓는다. 20대 중반의 문헌학 교수 니체는 어떤 역사 이해가 우리 삶에 진정으로 쓸모 있고 꼭 필요한가를 고민했으며, 이는 허무주의 역사철학을 수립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먼저 역사를 기념적 방식으로 파악하려는 자는 삶의 목표를 행복에 두며 체념에 대항하고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을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동력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역사관에서는 “오래전에 지나간 순간 중 최고의 것이 (……) 아직 생생하고 밝고 위대하다는 것”(303)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산물을 영원한 것으로 보고 자신의 현실에 대해 맞선다. 이들이 “과거의 위대한 것을 보고 또 그것을 고찰함으로써 더 힘을 얻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303)낀다. 인생의 행복은 현존재를 얼마만큼 멸시하느냐에 따라 누릴 수 있다는 쓰디쓴 생의 교훈을 경험한다.

이러한 기념비 수립 과정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것의 상관성과 연속성에 대한 믿음이며, 세대교체와 무상함에 대한 저항”(304)을 뜻한다. 이들은 모든 기념비적 역사를 자신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완전한 구현이며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그 기념비 속에서 역사의 고유한 본성과 유일성을 숭배하고자 한다. 니체는 그 예를 모든 민족의 명절이나 종교나 전쟁 기념일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관의 한계는 원인과 결과의 연관성을 날조한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서 니체는 이에 대해 “기념비적 역사는 유추로 기만한다. 그것은 유혹적인 유사성으로 용감한 자를 무모함으로, 감격하는 자를 광신으로 선동”(306)할 것을 지적하면서, 만약 “재능 있는 이기주의자와 광신적인 악한 손과 머리에 [역사가-필자 주] 있다고 상상한다면, 제국은 파괴되고 왕은 살해되며, 전쟁과 혁명이 발발”(307)할 것이라며 그 위험성을 지적한다. 

가령 니체가, 예술사와 관련해서 “기념비적 역사는 그들이[전혀 예술적이지 않거나 예술가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필자 주] 그 시대의 강한 자와 위대한 자에 대한 증오를 지난 시대의 강한 자와 위대한 자에 대한 감탄으로 포장하는 가면무도회 의상이다”(308)라고 할 때, 니체는 위대한 것을 창조하려는 의도로 과거 위대한 것에 감탄하고 감격하는 내면에는 증오와 파괴, 부정과 살해 음모가 반드시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니체의 이러한 역사 평가에는 니체가 수립한 허무주의(Nihilismus)가 작동하고 있다. 니체의 역사철학의 핵심을 허무주의라고 한다면, 역사에 대한 니체의 근본 이해는 허무주의가 그 바탕이다. 허무주의는 현실을 철저히 부정한다. 달리 말하면 더 강력한 현실 부정은 더 위대한 기념비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허무주의 논리에는 더 위대하다고 평가할수록 더 파괴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지배한다. 이러한 허무주의 시각은 역사의 위대한 기념비를 만들고자 투쟁하는 자의 기념비적 인간에게는 동기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기념비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혹독하게 가르친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골동품적 시각이나 비판적 시각도 지배한다. 골동품적 역사관은 과거 보존 즉 역사적 유산들, 과거의 관습과 문화 혹은 제도를 통해 삶의 안정성과 소속감을 확보하려는 태도다. 이에 대해 허무주의는 이를 퇴폐적 행태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골동품적 시각은 현재를 극복하려는 창조적 의지를 ‘악한 의지’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적 역사관은 현재와 과거 역사를 오류와 억압, 적폐 자체로 보고 비판과 단절, 파괴와 극복의 대상으로 보려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과거에서 어떠한 긍정적 의미도 확보할 수 없다는 자기 한계에 부딪히게 하며 현재의 비판적 시도 자체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니체의 역사 이해는 모두 역사의 주체가 인간 현존재라는 틀 속에서 갇혀 버린 필연적 결과다. 시간 역사 속에 함몰된 체계 속에서 비판적 자기 극복이란 허구이며 자기 속임수다. 서구 역사가 근현대를 지나면서 자기 극복을 시도했지만 그 목표가 무엇인지,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 현재 모든 것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한때 근대의 인간 중심적이며 낙관적인 역사관, 미래 발전의 세계관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세기를 지나면서 적어도 서구는 모두 포기했다. 역사의 동력이 무엇인지 그 물음을 던지는 것조차 불허하는 그야말로 현재는 무의미한 허무주의의 역사가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의 역사 섭리를 신뢰하고 소망하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에게는 이 시대에 주어진 가장 위대한 유산이며 현존재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의 사건이다. 할렐루야!


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8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5-8)

<263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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