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0-08-18 10:1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스물 여덟. 유럽 종교개혁의 한계선 : 근대 초의 폴란드


4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5상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 45:4~5)

본문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친구이자 필사자(서기관)였던 바룩과 관련된 내용이다. 남유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바룩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의 절대주권성을 알려준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헐어버리기도 하고 심기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바룩이 고민할 사항이 아니라는 책망 어조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당할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든 고통에 함께 했던 동역자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불에 타는 장면을 목격한 자이며 비운의 종말을 맞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을 바룩은 여호야김왕 앞에서 낭독한다. 그 내용은 남유다가 결국 처참하게 멸망한다는 예언이었다. 이 내용을 듣던 여호야김왕은 그 두루마리를 빼앗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바룩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애굽으로 잡혀가 그곳 이방 땅에 묻힌 비운의 서기관이다. 바룩의 심경에 답답함을 가중시키면서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권과 의미와 해석이 전적으로 자신이 작정하신 뜻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엄격하게 가르쳐주신 내용이다. 우리는 이러한 절대주권적 역사 섭리를 종교개혁 시기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계에 있는 한 나라를 잠시 응시하면서 숙고하고자 한다. 폴란드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무렵 폴란드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경계선을 긋는 역사를 섭리하셨다.

본래 게르만 민족이 살았던 지금의 폴란드 땅은 10세기경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하는 폴란드 왕국을 수립하면서 향후 융성과 몰락과 비운의 역사를 겪는 나라가 되었다. 작은 공국(公國)으로 분열이 가속화했던 13세기의 몰락과 암흑의 역사는 향후 폴란드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는 전조처럼 보인다. 로마 가톨릭의 대주교와 귀족들 사이에서 벌였던 성직임명권 투쟁은 폴란드를 분열의 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남쪽에 위치한 헝가리와도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리고 리투아니아족을 중심으로 한 발트해 연안의 부족들과의 충돌도 국가의 통일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으며 독일 기사단의 침략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런데 독일 기사단의 약탈은 폴란드를 딜레마에 빠지도록 했다. 왜냐하면 기사단의 명분이 바로 가톨릭의 포교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폴란드 내의 비가톨릭인들을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가톨릭교도로 개종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폴란드인들이 단지 자국민의 약탈을 지켜보기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야기했다. 하지만 13세기 폴란드에 안겨준 최대 피해는 몽골의 침략이었다. 3차 이상 발발한 대몽골의 침략과 향후 수백 년 동안 몽골인들의 침략과 약탈은 그야말로 폴란드의 농촌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13세기의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가 극에 달할 무렵 외부 침략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귀족들이 연합을 꾀하면서 왕권이 강화하고 통일 왕국의 기회가 찾아온다. 폴란드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불리는 카지미에시 대왕(Kazimierz Wielki)인 카지미에시 3세 비엘키(Kazimierz III Wielki, 1310-1370)에 의해 초토화했던 폴란드가 통일왕조를 수립한다. 그는 현재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와 타협했으며 독일 기사단을 저지했다. 또한, 그리스 정교를 믿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동시에 리투아니아에 대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회유했으며 그 결과는 효과적이었다. 헝가리와 룩셈부르크도 이러한 개종 대열에 합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그의 큰 업적은 1364년에 크라쿠프에 야기엘론스키 대학을 건립하였다. 공무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중앙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대학이다. 국가 운영을 위해 법학에 상당한 비중을 두면서 폴란드 학문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잘 아는 코페르니쿠스와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대학을 거쳐 갔다. 그리고 이러한 번영의 시대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한 사람의 대공(大公)에 의해 거의 통일 국가를 이루는 상황까지 전개된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두 민족 한 국가 체계의 야기에우워 왕조는 그룬발트(Grunwald)에서 독일기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한다. 15세기 말에는 야기에우워 왕조가 주변 네 나라를 차지하기도 했다. 체코와 헝가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모두 그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였다. 한때였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후 서유럽에서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6세기 말 폴란드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1573년 1월에 체결된 ‘바르샤바 동맹’(Confederation of Warsaw)이었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장하는 사건으로 유명한 이 동맹은 새로운 정치제도를 위한 법적 근거가 되었다. 나아가 다양한 민족들(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러시아인·독일인·그루지야인·유대인)의 문화와 다양한 종교(가톨릭·루터파·칼뱅파·동방정교회·아르메니아파·이슬람교)를 승인하는 공존의 길을 열어 국가적 단결을 꾀한다는 목적의 동맹이었다. 당시 이러한 동맹이 보여준 종교적 관용에 대해 폴란드를 ‘이단자 보호시설이 있는 곳’으로 칭하기도 했다. 개혁파와 루터파가 지배하는 서부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배척당하고 핍박받았던 재세례파와 삼위일체 반대파인 아리우스주의자들(Arians)도 폴란드에서는 안전하게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후의 역사에서는 폴란드가 비록 분열과 퇴락과 몰락의 길을 겪지만 ‘바르샤바 동맹’은 상호승인과 공존을 위한 대타협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진리의 발전 역사는 향후 폴란드 역사에서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독일 북부와 폴란드를 경계로 동유럽과 북유럽은 ‘오직 성경만’의 종교개혁 정신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길을 간다. 물론 그러한 흐름조차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하는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196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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