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4-09-01 21: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도(道)를 보아도 볼 수 없을진대


視之不見, 名曰夷(시지불견 명왈이)
聽之不聞 名曰希(청지불문 명왈희)
搏之不得 名曰微(박지부득 명왈미)

보아도 볼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이’이라하고,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 하고,
잡아도 붙들 수 없는 것을 일컬어 ‘미’라 한다

(노자 14장)

노자는 보아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말은 ‘도를 도라하면 더 이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도가도비상도 도가도비상도)나 ‘도가 비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가 늘 그러한 것이 아니기에 사계절의 변화를 본다하더라도 그 도를 볼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변화가 온 우주를 감싸안고 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노자의 도는 비어 있기에 역시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노자 14장의 내용이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고 잡아도 잡을 수가 없다”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아도 볼 수 없는 것은 ‘이’(無色, 무색)다.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은 ‘희’(無聲, 무성)다. 잡아도 잡을 수 없는 것은 ‘미’(隱微, 은미)이다. 이 셋은 그 근원을 캐물어도 알 수가 없다. 자연의 색은 무슨 색일까. 자연의 소리는 무슨 소릴까. 자연을 어떻게 붙잡을까. 더욱이 이 셋은 서로 섞여서 하나(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混而爲一, 혼이위일). 처음부터 이 세 가지(三者, 삼자)는 무(無, nonbeing)로부터 늘 그렇게 계속 이어져 왔다. 이러한 노자의 논리 안에서는 이 삼자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물 아닌 것’(무물, 無物, non-being thing)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일컬어 ‘(형)상 아닌 상(모습)’(無狀之狀, 무상지상)이라거나 ‘물(질) 아닌 물’(無物之象, 무물지상)이라 한다. 이러한 도의 특성은 ‘홀황(惚恍)’하다 곧 ‘딱히 정해서 말할 수 없다’거나 ‘있는 듯 없는 듯해서 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만일에 누군가가 이 태고의 도를 다잡아서 오늘의 ‘있음’(有, becoming)을 몰아갈 수 있다면 태고의 시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노자의 도가 지니는 ‘규율’(道紀, 도기)일 수 있다. 과연 인간은 이 도를 보고 듣고 붙잡을 수 있을까. 아니 도는 정말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일까.
로마제국의 제2의 건국자라해도 손색이 없는 율리어스 카이사르는 ‘사람이란 존재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자신이 보는 세계에 관심을 보이며 이 세계 속에서 즐거워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것도 없고, 붙잡을 수 없는 것도 없다.
사실 보고 듣고 붙잡고자 하는 인류의 욕망은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확대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정의 부모는 남편이나 아내의 마음대로 다스리기 위해 애를 쓰며, 자녀의 학업이나 생활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기업의 운영자는 기업의 운영이나 미래까지도 확실히 보이는 세계로 만들고자 한다. 또 사회나 국가의 모든 관계망 역시 그 전 과정이 통제되고 질서지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사람의 성격조차도 서로 간에 보고 듣고 붙잡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과학이나 기술, 자본 등을 가지고 이러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까. 과연 사람의 마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을까.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그 세상을 기뻐하셨고 사람을 기뻐하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은 세상과 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이 의도했던 자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실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노자의 도와 인간의 욕망의 도를 넘어설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기뻐하심을 보는 것이다. 들리는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심과 그의 기뻐하심을 듣는 것이다. 잡을 수 있는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단언컨대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붙잡을 수 없는 하나님을 붙잡아야만 한다. 특히 기독인은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여겨서는 안 되고, 보이는 세계가 불교에서 말하는 허망한 세계라 부정하여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기독인은 어떻게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들리는 세계를 통해서, 잡을 수 있는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붙잡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는 방법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안에서 식사할 수 있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기독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substance)’가 되어주며 보지 못하는 것(일)들의 증거(evidence) 곧 그것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히 11:1). 바울은 친히 자신이 당해야했던 현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붙잡았다. 기독인이여 노자는 도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생한 부부생활, 부모자녀생활, 교사생활, 학생생활, 직장인 생활, 성도와의 교제 등 온갖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세계야말로 노자가 그토록 추구하고자 했던 하지만 이룰 수 없었던 도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박사(교육학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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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도라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