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09-14 21: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자르고 마름질하고 쪼아내고 갈아내자


瞻彼淇奧 菉竹?? 저 기수의 강가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가
첨피기욱 녹죽의의 무성하고 아름답다
有斐君子 如切如嗟 如啄如麻 문채 나는 군자여! 자른 듯 마름질한 듯 쪼은 듯, 간 듯 하구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
瑟兮?兮 赫兮喧兮 엄숙하고 당당하며 빛나고 위엄 있네
슬혜한혜 혁혜훤혜
有斐君子 終不可?兮 문채 나는 군자여! 끝내 잊지 못하리
유비군자 종불가훤혜
(대학 전문 3장)


 ‘첨피기욱 녹죽의의’는 시경 위풍(衛風)의 ‘기욱’편에서 빌려온 글이다.
첨은 바라보다 또는 쳐다보다라는 뜻이다. 기는 기수(강)를 뜻하고 욱은 강의 후미진 곳을 뜻한다. 녹죽은 푸른 대나무다. 기수 강 후미진 곳에 푸른 대나무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대나무가 쭉쭉 뻗어 그 당당함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의의’다.
대학의 저자는 군자의 모습을 기수가의 대나무가 푸르고 푸르른 그리고 당당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서 찾고자 하였다. 유비(有斐)는 배움을 통해 다듬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군자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쓰였다. 절(切)은 칼이나 톱으로 자른 반듯한 모습이다. 차(磋)는 줄이나 대패 같은 것으로 잘라진 나무를 평탄하고 반반하게 갈아놓은 모습이다. 탁(啄)은 망치나 정으로 돌 같은 것을 쪼아 놓은 모습이고 마(磨)는 모래나 자갈 같은 것으로 고르게 연마한 모습이다.
스스로를 자르고 갈아대는 자세는 군자의 배움의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군자는 형태(形)와 바탕(質)을 형성하게 된다. 스스로를 쪼아대고 연마하는 자세는 자신을 닦음으로써 드러나게 되는 흘러넘침과 윤택함의 모습이다. 군자는 이러한 삶을 통해 훈련된 자이기에 무르익은 덕성을 갖추고 있고 이런 과정을 계속해 가기에 자신의 정미함을 잊지 않는다. 그는 언제든지 선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자를 어찌 사람들이 잊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유교의 군자는 기독교에서는 모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참 신앙의 푸르름과 강인함, 그리고 당당함으로 위엄 있게 살아가는 자이다. 그(녀)는 자신을 말씀으로 자르고 마름질하고 쪼아내고 또 갈아가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초보적인 도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고 외친다(히6:1,2).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 세례를 받았다거나 주어야 한다는 것,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 영원한 심판에 관한 내용들 늘 이러한 일들만을 말하고 검토하고 불안해하거나 서로를 판단하려는 등의 일들은 모두 초보의 수준에 있다. 회개와 믿음이 중요하다면서 무슨 일에서든지 참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로 부딪치고 벗어나지 못하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서고 세계를 향해 가지 못한다면 모두 초보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초보의 수준에서 넘어서서 완전한 데(purfection)로 나아가야 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자. 그러나 완전하게 하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완전하게 하자. 세례를 받기도 하고 주어야 한다. 역시 완전하게 하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도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이랬다저랬다 흔들리지 말고 완전하게 해 두자. 하나님이 허락하시기에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한의 기독인이여!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말씀과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과 몸을 닦고 갈고 쪼고 연마하여 세상이 잊지 못하는 크리스천 군자가 되자. 할 수만 있다면 어느 한 분야에서만이라도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크리스천 군자가 되어 보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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