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6-02-21 21:1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나라를 다스리자


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 其家不可敎 而能敎人者無之
소위치국필선제기가자  기가불가교 이 능교인자무지
故君子不出家而成敎於國 孝者所以事君也 弟者所以事長也 慈者所以使衆也
고군자불출가이성교어국 효자소이사군야 제자소이사장야 자자소이사중야
康誥曰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未有學養子而后嫁者也
강고왈여보적자 심성구지 수부중 불원의 미유학양자이후가자야
-중략-
是故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시고군자유저기이후구저인 무저기이후비저인
所藏乎身不恕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 故治國在齊其家。
소장호신불서 이능유저인자 미지유야 고치국재제기가




본문은 전문 9장의 내용 일부이다. 원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를테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먼저 집안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없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훌륭한 사람)는 집안을 나서지 않았어도 나라 안에 가르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군자가 집안에서) 효를 행하는 것은 (장차) 임금을 섬기는 근거이다. 우애를 돌리는 것은 윗사람을 섬기는 근거이고 자애를 베푸는 것은 백성을 일하게 하는 근거이다. 강고(주서)에서 말하기를 ‘갓난아이를 돌보듯이’라고 했는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아이를 돌보는 방법을) 구하면 (그것이) 비록 딱 맞지는 않더라도 본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서) 아이를 기르는 법을 배우고 시집을 가는 사람은 없다. -중략-
이렇기 때문에 군자는 (먼저) 자신에게서 (바른 법도를) 찾고(실천하고) 난 후에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서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신 속에 너그럽지 못함을 쌓아두고서 다른 사람을 깨우치는 자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림이 집안을 다스리는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군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이 여긴다. 형제와의 우애로운 생활은 웃어른을 섬기는 근본으로 보고 있다. 자애로움은 장차 다른 사람을 일하게 하는 기본이다. 늘 어떤 일에서든지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진리에 딱 맞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올바른 도리에 가까운 삶의 실천이라고 본다. 
일방적인 효도의 강요는 의미가 적다. 효는 나라의 통치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하다. 단순히 우애하는 것도 별로다. 우애의 생활을 익히는 것도 웃어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다. 왜 갓난아이를 보듬어 살펴보듯이 매사에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누구를 만나든 바른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먼저 경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아이를 먼저 길러보고서 부모가 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는 모든 사태를 장차 대통령을 상대하고 위대한 사람들을 상대하고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고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이기에 효도해야만 하고 학생이기에 공부해야만하고 아직 학문이나 기술 등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무조건적으로 목적이 없더라도 어떤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허례다. 어려서부터 가정 안에서 적극적으로 장차 나라를 다스릴 마음가짐과 기세로 효도하고 우애하고 늘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돌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나라와 비견될 수 있다. 모든 성도의 교회 내에서의 생활은 곧 바로 가정의 생활과 이어져야 한다. 교회의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자 절제하고 신중해야 한다. 단정하고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 일구이언을 해서도 안 된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데살로니가전서 3장 2~9). 신앙인의 아내와 남편은 사랑하는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는 그것이 양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양심이 담긴 절제이어야 하고 신중이어야 한다. 한 입으로 서로 반대되는 말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과 생활했던 제자들의 삶은 후에 그대로 교회의 생활로 이어져갔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된 것이다. 도마의 의심과 고백, 베드로의 무모함과 고백, 요한 형제들의 저돌성, 사도 요한의 온유함 등이 모두 신앙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신앙인의 가정은 이제 제자들의 삶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담긴 행동과 말하기, 절제와 신중, 단정함 등을 익히고 실천해야 한다. 교회에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구이언하는 버릇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방만하고 산만한 모습, 절제와 신중함이 없는 태도, 양심 없는 설교와 신앙고백 등등의 난무는 이러한 자세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참 양심으로 가정에서의 삶을 절제와 신중과 단정함으로 하고 양심에 없는 말을 하지 않아서 교회의 참 모습을 세워가야 할 때다. 대한의 신앙인들이여! 가정에서의 삶을 양심을 담아 바르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단정하게 하는 길로 나서도록 하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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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死神) 시대의 신(神): ‘몸부림치는’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