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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작성일 : 16-05-18 21:0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미래 철학자’: 세계심판자-세계창조자


“만약 내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하자면 미래를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오늘을 살아야 할지 그 방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앞을 내다보는 자, 갈망하는 자, 창조하는 자, 미래 자체 그리고 미래를 향한 교량 (……)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든 것이다. (……) 나는 미래의, 내가 내다보고 있는 저 미래를 건설하는 데 조각돌로 쓰일 사람들 사이를 거닌다.”<이상범, 「니체의 “미래철학”에 대한 연구」, 『니체연구』제26집(한국니체학회, 2014년 가을), 217쪽 재인용. 이하 인용은 괄호에 쪽수 기입함.>    앞의 긴 인용은 신 죽음을 선언한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구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니체는 자기 시대에 필요한 철학자는 현재의 정황을 바로 파악하여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을 알리는 예언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갈망하는 자’라는 말에는 필연적으로 다가올 미래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계산하지 말고 수용해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상징적인 인물로 ‘차라투스트라’를 소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우선 자기 시대의 정신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자다. 아무리 혐오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현실을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일체의 불합리함과 부당함이 몰려온다고 할지라도 이를 무한한 자기 극복과 자기 정립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이는 현실에 매몰되는 무기력한 태도가 아니라 분명한 삶의 정황 즉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이 지배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사태의 극단적인 양면성을 철저히 의식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순간순간을 즐기고 자유롭게 삶을 긍정하려는 인간 유형이다.  어린아이 이미지는 니체에게 유치하거나 유약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창조의 동력을 스스로 배양할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뜻한다. 창조의 요점은 이미 확보한 소유물이나 굳어버린 가치들을 고집스럽게 지키고자 하는 태도와는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니체의 어린아이 비유는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억압 구조에 대해 쉽게 흥분하거나 막무가내로 저돌적 공격을 감행하는 사자 이미지와 대조되기도 한다. 어린아이는 놀이에서 의무감을 앞세우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힘겹게 극복해야겠다는 것마저 의식하지 않고 내면에서 약동하는 창조적 의지에 충실하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는 자기 기준의 선악이 그리 명확하지 않다.  결기 어린 용단과 같은 행동은 어린아이의 삶에는 필요하지 않다. 어린아이 이미지에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니체의 미래 철학자,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앞서 말한 어린아이의 생존원리를 의식하며 실천하는 자이며, 인간 실존의 현장을 아이가 자유롭게 놀며 새로운 놀이 규칙을 무한히 창안하고 해체하는 그래서 가치창조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열린 공간(이러한 공간을 니체는 ‘대지(大地)’라고 부른다)으로 보려는 자다. ‘초인(超人)’으로 번역하는 니체의 미래 인간유형인 Ubermensch(위버멘쉬)는 영어 번역 ‘슈퍼맨(superman)’으로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위버멘쉬는 철저하게 ‘바로-지금-여기-이 공간-이 모습’으로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해 분투하는 유한한 인간이다.  니체가 본 그리고 그가 원했던 미래 문화의 창달자로서 위버멘쉬는 “다양하면서도 전체적이고 폭이 넓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앞의 논문, 244쪽 재인용)는 태도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인간 유형이다. 새로운 양식의 자발적 창조는 기존 가치와 이상을 동시에 더욱 철저히 파괴해야 하는 자기모순의 운명을 늘 요구한다. 이러한 비극적인 자기 운명의 실험을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겪어야만 하는 자가 위베멘쉬다. 그는 구습에 안거(安居)하려는 최소한의 욕구마저도 파괴해야 자기 창조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자다! 이러한 정황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이자 입법자이다 (……)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를 규정하며 이때 모든 철학적 노동자와 과거를 극복한 모든 자의 준비 작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며, 그들의 진리를 향한 의지는-힘에의 의지이다.”(앞의 논문 238쪽 재인용)  니체가 원했던 미래의 철학은 어른의 간섭 없이 어린아이가 노는 듯한 자유와 해방의 철학이다. 자유로운 창작 행위인 어린아이의 놀이를 어른이 개입하여 인위적 규칙을 만들면 놀이를 망쳐버리듯, 서양 기독교가 만든 종교적 도덕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로운 창조 의지를 원천적으로 파괴해 왔다. 몸에서 일어나는 경계를 정할 수 없는 인간의 그 무한한 욕망과 의지를 보면서 니체는 스스로 ‘세계심판자’와 ‘세계창조자’ 사이를 오간다. 니체의 ‘신 죽음 신드롬’이 더욱 확산하는 풍토에서 ‘절대 자유’를 대가 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다음 명제는 다시 깊은 묵상 속으로 이끈다.        31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며 32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요 8:31~32/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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