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의 문체론: 천재에 대한 우상론
천재적 저자는 표현의 단순함과 명확성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거대한 힘은 소재가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소재와 놀이를 한다. 어느 누구도 미지의 수천 개의 심연으로 단절된 길을 서투른 발걸음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천재는 그러한 소로를 단호하게 혹은 우아하게 뛰어넘으며 달려가고, 여기저기를 겁먹은 듯이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발길을 비웃는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천재 저자의 능력은 간단명료하고 명확한 표현 기법마저 넘어서는 존재다.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직면한 천재는 어떤 주제라도 분명하고도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다. 문법적 법칙을 철저히 고수하면서도 논리적 모순을 피해 가기보다 오히려 모순을 아이들의 놀이처럼 자유롭게 즐기듯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천재 저자는 글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창의적인 발상에 대해 항상 거리두기를 의도한다. 마치 아이들이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항상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며 놀이하듯이, 천재 저자들은 주제에 대해서는 명확하되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고정된 방식에 결코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가 다양하게 드러날수록 천재 저자에게는 그 결과가 종결과 완성이면서 동시에 전면적 부정을 열어놓는다. 이로써 그들은 항상 새로운 관점이나 발상의 무한성을 지향하며 예상치 못한 돌발적 우연성을 위대한 창조물의 연결고리로 삼는다. 이들에게 지식과 정보의 누적은 신선한 창작의 장애물이 된다.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니체는 지식 누적과 정보 취합만을 작품 창조의 요건으로 삼지 않는다. 수천 개의 미지의 심연에 맞서는 천재는 미로 같은 숲에서 정보가 부족하여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숲을 자신의 놀이터처럼 자유자재로 누비며, 어려움을 즐기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 문법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내용 없이 화려한 수사학에 집착하는 저자들을 경멸한다. 통상 문체론의 요소를 말할 때 작가의 스타일 즉 독특한 표현 방식, 단어 선택 능력, 문장 구성력, 리듬과 템포 등을 말한다. 리듬은 작품의 분위기를 설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감정 전달, 특정 아이디어나 테마의 강조는 리듬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예를 들면, 빠르고 단조로운 리듬은 긴박감이나 긴장을 조성하고, 느리고 조화로운 리듬은 평온함이나 깊은 성찰의 분위기로 안내한다. 가령 비평가가 작가의 창작 의도와 개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리듬을 분석하면서 예술성의 수준을 분석한다.
이러한 작가의 모든 요구 조건을 의식하면서 니체는 당대 천재라 불리는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ß, 1808-1874)를 정밀 분석하고 비판하여 해체를 단행한다. 독일의 속물적 지성의 대표자가 슈트라우스라고 규정한다. 니체가 볼 때, “교양 속물이 지닌 사이비 문화의 특성”(260)을 한 몸에 지닌 자가 자유주의 신학자 슈트라우스였다. 평범한 사람들과 상식 수준의 지식인들이 볼 때 슈트라우스는 앞서 설명한 작가의 모든 요건을 갖춘 천재 작가다. 하지만 니체의 눈에는 슈트라우스에게 보내는 칭송은 독일 문화를 저급하게 몰아가는 집단 몰이해이며 문화적 퇴폐로서 데카당스의 전형이다. 가령 니체가 “진실로 생산적인 모든 것은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이다”(260)라고 말할 때, 어중이떠중이들의 슈트라우스 찬미는 그 작품이 생산적이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은 저속한 저작물이라는 방증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속물 교양을 부추기는 당대의 가장 위험한 자들은 다름 아닌 저급한 언론들이라고 질타한다. “그들은[언론인들은-필자 주]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취향을 상실했으며, 그들의 혀는 기껏해야 완전히 부패한 것과 자의적인 것에서 일종의 만족을 느낄 뿐이다.”(260) 니체는 당대의 언론에 대해 독자를 속이고 저급한 내용을 마치 수준 높은 문화적 취향처럼 둔갑시키는 저질 집단이라고 혹평한다.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교양의 부패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내용의 진정성보다는 저속하고 상업적인 이익에만 몰두하는 집단이 언론이라는 말이다. 언론이 사실보도보다는 선정성을 부추기고 축소나 과장, 왜곡을 일삼는 것은 니체 당대나 지금이나 언제나 반복한다. 일반 대중 독자들은 이러한 언론 환경에서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을 얻을 뿐 깊이 있는 사고나 진지한 대화를 이어갈 수는 없다.
대중의 취향을 저급하게 타락시키고 비판 능력의 뿌리마저 상하게 하는 언론의 타락한 글쓰기에 대해 니체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말을 빌려 이렇게 비판한다. “뻔뻔스럽게 으스대는 멍청함이 나를 구역질 하게 한다. 아름답고 오래된 고전 저서를 소유한 언어가 무지한 사람들과 얼간이들에 의해 학대당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정말 진정한 고통이다.”(266) 이러한 문화에 역류문을 작성하면서 저급한 대중문화를 돌파하고자 니체는 독창적인 글쓰기를 시도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니체는 ‘겁 없는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창조적 에너지를 창작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수천의 두려운 심연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천재 작가는 바로 그 자리가 자신의 문체가 완성되는 순간으로 받아들인다. 그야말로 문체 앞에서 가장 정직한 존재가 되는 자가 니체가 말하는 천재 작가의 요건이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그야말로 문체 자체가 신적 권위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다. 니체는 성경을 신적 영감으로 완결된 천재 작가의 작품으로 볼 수 없었다. 성경을 신적 권위의 절대진리로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몸부림은 가장 정직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순진함이자 니체의 어리석음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천재도 순수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19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전 1:19-20)
<255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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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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