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예순셋: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폐해,교황 부패의 명분을 주다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주저(主著) 중 하나이며 13년간 집필한 저서가 『신의 도성』이다. 14권 마지막에 그는 “지상의 도성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천상의 도성은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적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어떠한 나라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 된다. 그렇다면 지상에 세운 교회도 하나님의 도성(都城, Civitas Dei)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은 이 지상에 세운 서방 가톨릭의 천 년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모순적 명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을 울타리 삼아 만든 지상의 제도권 교회가 ‘천상의 도시’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상의 도성, 세속 국가는 그보다 우월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너무도 위험한 발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장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천 년 동안 세속 국가에 대해 권력 우위를 주장하는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교황이 세속 통치자를 넘어서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의 원천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都城) 논리다. 더 나가 보면 중세 유럽 역사에서 발생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수많은 권력 투쟁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연루된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중세 교황권의 강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역사적 실례를 든다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y VII, 재위 1073-1085)의 경우다. 그는 11세기 교황권 혁명을 통해 세속 권력에 대해 교회가 상위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론’ 신학에 토대를 둔다. 교황은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간주했으며, 왕을 포함한 모든 세속은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서임권 투쟁(Investiture Controversy)’ 과정에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갈등을 격화시키고 결국 황제를 파문하였으며 황제는 이를 철회하기 위해 카노사의 굴욕(Walk to Canossa)을 겪게 한다. 교황이 세속 권력에 대해 신적 권위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사건이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원용(援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교황 부패는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재위 1198-1216)에 이르러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가 재위했던 기간은 교황권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였다. 가톨릭교회가 황제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교회가 승리자가 되었고 이는 천상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부풀려진다. 극대화한 교황 권력은 서유럽 전역에 걸쳐 세속 군주를 통제하고 압박하는 일로 확대되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하나님의 도성이 지상의 모든 악의 세력을 응징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이는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보이는 선전 도구였다. 이노센트 3세는 교회 권력자와 세속 통치자들 간의 관계를 태양(교황)과 달(왕)에 비유했다. 세속 권력은 항상 교회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만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4세(Otto IV, 1175-1218)와 권력 투쟁을 전개했다. 교황은 처음에 오토 4세를 지지했다. 하지만 오토가 교회의 재산권과 통치권을 침해하자 그를 파문하고 폐위시켜 버린다. 권력의 부패가 극에 달하는 사건이지만, 반대로 신의 도성이 인간의 도성을 이긴 사건이며 신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떠벌려진다. 이를 계기로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를 황제로 임명하는 권한까지 행사한다. 세속 군주에 대한 임면권(任免權)이 모두 교황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밖에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영국 왕 존(John, 1166-1216)과 벌인 권력 투쟁이 있다. 이 둘의 권력 갈등은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에서 시작한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존 왕은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을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이를 반대하고 자신이 선택한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을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자 존은 이를 거부하고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다. 하지만 결국 존 왕은 권력을 잃게 되고 이노센트 3세는 1209년에 존을 파문해 버리고 잉글랜드 전역에 종교 의식을 중단시켜 버리는 금교령(Interdict)까지 내렸다. 금교령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대해 성사 집행을 금지하는 교회의 징벌 조치다. 이 제재는 교회 권력이 세속 통치자를 통제할 때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다.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거나 교회의 법률을 위반할 때 교회가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다. 그 결과 존 왕은 결국 교황에게 굴복하고 만다.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여 스티븐 랭턴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면서 자신의 왕국 전체를 교황의 봉신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교황 이노센트 3세가 보여준 권력 부패의 최악은 4차 십자군(1202-1204) 전쟁에서 드러난다. 이 전쟁은 본래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과는 달리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잔혹극으로 끝난다. 처음에 내세운 명분이야 영적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되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예루살렘 회복은 그 목표에서 사라져 버린다. 베네치아는 십자군의 재정적 어려움을 구실로 삼아 교황의 군대 십자군을 동방 기독교 왕국의 수도인 비잔티움 제국을 침략하도록 내몰았다. 결국 교황의 묵인 아래 콘스탄티노플은 약탈당하고 잠시 붕괴되어 버렸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처음에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결국 그 약탈의 결과를 받아들여 세속국가 라틴 제국의 설립을 승인해 버렸다. 종교적 명분마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부패의 전형이다. 교황권 강화를 위해 늘 악마화한 세속 권력과도 타협하는 이러한 행태는 중세 교황권의 본질이 무엇이며 천상의 도시를 도용하여 저지르는 종교적 부패의 막장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부패한 교황들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러한 비행을 저지르면서 늘 아우구스티누스를 흠모한다. 그들의 입지를 떠받치고 있는 선배가 그였기 때문에.
<264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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