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역사 해석의 과잉으로 인한 정신 질환들에 대해
강한 인격만이 역사를 감당할 수 있으며, 약한 인격은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니체의 초기 철학에서 역사관은 매우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그는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한 조건을 특히 강조한다. “왜냐하면 감정과 감각이 자신에 비추어 과거를 평가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면, 역사가 감정과 감각을 혼란시키기 때문이다.”(330)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강한 인격의 소유자는 역사를 통해 현재의 삶을 주도하는 주인의 삶이 되지만, 인격이 약한 자는 과거 역사에 압도당하여 현재의 자신을 붕괴시킨다. 역사에 압도당하는 자에 대해 니체는 ‘감정과 느낌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평가한다. 이는 과거와 역사를 대면할 때 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강인한 사유와 내적 성숙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는 단지 유약한 감정 상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의 부재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니체에게 역사를 대할 때 ‘감정(Gefühl)’과 ‘느낌(Empfindung)’은 매우 중요한 해석의 원천이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현재의 의미를 창출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과 느낌이 강하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과 그 의미를 현재 자신의 삶 속에 통합시키면서 자기 정체성과 미래 비전에 대한 의지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 발휘의 잠재력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역사에 짓눌린 유약한 상태는 과거의 위대함을 그리워하면서 그 무게에 압도당한 경우다. 과거 해석으로 스스로를 열등하게 만들고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가령 ‘우리는 과거의 위대함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지배한다. 현재의 자기 정체성은 혼란에 처하고 현재에 필요한 능동적 가치를 창안하지 못하므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미력마저 소진한다. 역사적 성공 사례들을 지나치게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는 우매함은 현재의 자기 감정과 느낌을 압살하고 만다.
이러한 역사 과잉(Übermass in Historie)에 매몰당함으로 자기 비관은 극에 달한다. ‘역사는 단지 반복할 뿐이다’는 운명적 비관주의에 빠지고 미래에 대한 창조적 비전은 소멸한다. 현재 삶을 짓누르는 역사의 해악을 니체는 이렇게 정리한다. 역사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라는 위험한 분위기에 빠지고 거기서 더 위험한 견유주의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대는 점점 더 교활하고 이기적인 실천으로 굳어가고 그로 인해 생명력은 마비되고 결국 파괴된다.”(325) ‘한 시대를 자기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라는 위험한 감정에 빠지게 한다’는 말은 한 시대가 지나치게 역사적 의식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미 부여가 오히려 냉소적이고 자기 비하 속으로 침몰시킨다는 말이다. 자기 존재와 가치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 역설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의심하거나 조롱하는 위험한 병적 상태로 몰고 간다. 마치 자신을 객관적 시각으로 조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적 의미 부여가 과도할 때 생기는 심각한 질병은 다음과 같은 태도에 잘 나타난다.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시대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 이 정도에 이르면 현재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서 미래 기대와 열정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역사에 대한 지나친 해석은 이처럼 모든 가치를 의심하고 현재의 의미를 부정하고 결국 삶의 동력을 상실한 냉소주의(cynicism)의 제물로 몰아갈 뿐이다. 이에 니체는 역사 해석의 원동력으로서 ‘강한 감정과 느낌’을 재차 강조하려고 한다. 유한한 인간 내면의 이러한 상황은 과거의 위대함이나 실패를 직시하고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현재의 실존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점에서, 니체에게, 실존의 ‘감정’과 ‘느낌’은 역사를 직시하는 유한한 인간 속에 담긴 무한한 가치의 동력이며 과거와 미래를 통합하여 현재를 긍정할 수 있는 창조력이다. 나아가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현재와 미래를 향한 강인한 정신적 태도로 견딜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런데 본질적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의 자기 감정과 느낌이 삶의 동력이 되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척도의 문제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니체의 물음에서 몰려온 우리는 현재의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감정과 느낌을 해석하는 기준이 더욱 절실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관에서 역사의 주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능력을 계시하는 사건이다. 문제는 역사 해석이며 동시에 올바른 해석을 하는지 어떻게 아느냐이다. 올바른 해석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기준이 인간이 확보할 수 있는지 심각한 질문이 꼬리를 문다. 그냥 지나가는 일상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으로 성립하려면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현재의 삶을 위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면, 그 교훈의 핵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질문을 더할수록,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역사 해석과 의미 부여는 불가능해짐을 알게 된다. 현재의 자기 실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실종되어 버린다.
애굽에서 학대받던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어버린 후 애굽 전역을 울부짖음과 통곡소리가 뒤덮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다. 단지 가나안으로 간다는 약속을 듣고 출애굽을 했는데 광야에서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 하지만 과거 사백 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에 대한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 수가 없다. 현재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가고 있지만 과거 역사와 현재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 그 미래의 목표가 무엇인지 더더욱 알 수 없다. 과거 역사의 해석과 함께 현재 사건에 대한 좌표 확정 그리고 미래 목표에 대한 약속이 절실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을 시작으로 역사의 주관자와 역사의 의미, 미래 역사의 목표까지 알려주기 시작하셨다.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신 4:32-36)
<269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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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예순다섯: 자유의지론의 열매, 동·서방 수도원 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