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3-04-14 12:4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현실, 또 하나의 몽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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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뜯어보면 현실은 모든 것이 우리를 얽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뜻을 좀 확장해 보면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도 담겨있다.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 중에서 인간 의지의 현실적 무기력함에 관해 지적한다. “존재의 익명적 소음”(앞의 책, 서동욱 역, p.108)이 그와 관련된 개념인데, 인간의 현실이 그럴듯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자신을 숨긴 채 ‘존재’는  몰래몰래 다가와 뭔가를 슬쩍 알려주고 간다. 소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소리가 분명하지도 않고 듣는 사람에게는 불쾌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존재’라는 개념은 서양철학 2천5백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확실하고 든든한 기둥 노릇을 하던 개념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서양에서 이렇게 파악했던 존재라는 게 불분명하기 그지없어서 모호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잡소리의 원인이라고 재평가한다. 의미가 어디에 서 발생하는지 누가 내는 소리인지 어디서 오는 소리인지 모두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진리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잠꼬대가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구체적인 일들이 그때마다 정해진 장소에서 무수히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무의미하다며 쉽게 방치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현실은 관리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애초부터 아니라는 말이다. 사건의 출처와 전개될 방향은 처음부터 숨겨진 채로 남아있다. 숨겨진 모습으로, 즉 익명적인 방식으로 있으면서 존재는 불필요한 소음을 일으키듯이 현실을 조작하고 가공한다. 
모든 사건에는 가까운 이유가 다 있다. 하지만 두어 번만 묻게 되면 행동하는 당사자 자신이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삶을 주도하는지 아니면 끌려가고 있는지 불분명하게 된다. 깨어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지 현실과 몽환의 경계를 넘나든다. 살아가고 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유익한 게 무엇인지 무익한 것이 무엇인지 등, 분명한 판단을 내리고자 하면 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현실의 답답함뿐이다.
그런데 이 모든 답답함과 모호함에는 니체의 엄격한 철학적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 전제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반드시 조작된 허구라는 점이다. 양보를 좀 해서 설사 그러한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 구조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두 번째 비극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 답답하면서도 무엇인가 분명한 것을 자리매김하고자 끙끙거리며 잠들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불면의 상태’라고 말한다.
불명확한 판단의 연속이 현실임을 감안할 때 깨어있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판단의 여지마저 사라지는 수면 상태도 아닌 ‘잠들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느끼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는 그 출처가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하면 알 수 없다. 빛나는 햇빛 덕분에 사물도 눈에 들어오지만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밤의 상태’에 가깝다.
불면의 상태는 잠을 잘 수 없는 상황과 자면 안 되는 상황, 하지만 자고 있는 듯한 상황이 겹치면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막아버린다. 이러한 상태에 갇힌 존재가 바로 현실이 얽어매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몽환의 현실을 헤쳐 나가려고 하며, 도대체 우리가 ‘누구인지’ 찾고자 몸부림친다. 거듭되는 나치에 의한 유대 동족에 대한 인종청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몸부림과 상관없는 엄격하고도 선명한 대답이 자기 나라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사야에게 들렸던 엄격한 명제를 주목하게 된다.       

(사 6;9)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를 막히게 하며 그 눈을 보지 못하게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 눈으로 보고, 그 귀로 듣고, 그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지도 모른다.”<사 6:9~10/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무의식, 자기중심의 근원
처참한 고통, 신성(神性)에 대한 절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