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하나님의 창조
이 땅에 살고 있는 인생의 최대목표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가? 사람들은 왜 날마다 일어나서 바삐 움직이고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는가? 왜 사는가? 사람은 왜 이 땅에 존재하여야만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그 어떤 서적이나 사상이나 학문도 답을 주지 않는다. 무의미한 질문만 던질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답을 준 철학자나 사상가는 없었다. 이 모든 인간의 사상을 뒤로 하고 오직 성경만이 그 물음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줄 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물을 지으셨으며 지금 이 순간도 천하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왜 사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배우고 먹고 자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나이 들고 병들고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임무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께 진실된 기도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깨닫는 만큼 감동의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論語)의 이인편(里仁篇)에서 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라는 말을 하였다. 이를 직역하면 ‘아침에 도(道)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며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다. 참된 이치를 깨달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후세들에게 좋은 교훈을 많이 남기고 영향도 끼쳤지만 정작 자신은 진리에 대하여 목말라하였던 것이다. 공자 자신도 ‘이 세상이 왜 지어졌는지, 내가 왜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영혼의 소망은 장소나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학의 혁명가로 여기는 아인슈타인도 진리에 대하여 항상 갈급함을 느꼈다. 그는 “나는 신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 나는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이러저러한 원소(元素)의 스펙트럼에 관심이 없다. 나는 신의 생각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자질구레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 등과 많은 연구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이 자연에 대하여 혁명적인 생각을 선도하였지만 그는 항상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하여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 두 사람과 같이 진리에 대하여 갈급함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바울은 강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 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 17장 22~25절)
공자가 그렇게 깨닫고 싶어했던 도(道)!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그 도(道)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道)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복잡한 스펙트럼보다도 신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했는데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신과 신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구구절절이 기록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이 알고 싶어 했던 그 신은 세상을 창조하신 신이시며, 자기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오래 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분이시다.
공자와 아인슈타인은 인간들 중에서는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지만 이 당시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도(道)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자 하였으나 알지 못하였고, 많은 성인들이 깨닫고자 하였으나 깨닫지 못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성경의 말씀이다. 우리는 온 천하의 비밀과 진리를 받아든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중생한 성도들의 삶은 행복하며 찬송과 찬양으로 가득하다.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하고, 온갖 동물과 식물 그리고 열매들을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각종 천체들을 관찰하고서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노래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더욱더 깊이 하나님을 알게 되며 우리들의 가슴은 찬양으로 끓어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성도의 삶이다.
이제 성경과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주관하심에 대하여 서술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공자와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갈구했던 도(道)와 신(神)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는 만큼 감동이 큰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피조세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에 대하여 놀라게 된다.
제1장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다. 이것이 믿어지는가? 만일 이것이 진실로 믿어진다면 인생에서의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된다. 인간관계 속에서의 갈등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들 그리고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저절로 해석된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 좁은 내 머리 속의 생각을 떠나본 적이 없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여행을 떠나보자. 우리가 로봇제조기술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에, 사람과 같이 생각할 수 있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는 관찰할 수 있는 튼튼하고 큰 유리로 된 원형의 상자에 이 로봇을 넣어두었다고 하자. 로봇제작자는 로봇이 관심 가질 만한 것들을 유리상자 안에 많이 넣어 두었다. 흙과 돌 그리고 물이 흐르게 하였으며, 나무, 풀, 장난감 그리고 천정에는 천체들의 모양을 딴 별과 달처럼 생긴 모형을 걸어 두었다. 이윽고 이 로봇에 전원을 넣고 상자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놓아두었다. 그리고 유리상자 안에서 이 로봇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기로 하였다. 로봇은 인공지능을 가졌으나 자신은 자신의 존재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자신은 존재하고 있으며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로봇은 자신 존재의 출발이 어디인지 궁금하여 자신의 몸을 만져보기도 하고 주변을 살펴보기도 한다. 그리고 깔아놓은 흙을 파 보기도 하고 유리상자를 두드려 보기도 한다. 그리고 유리상자의 천정에 매달려 있는 별 모형을 자세히 보기도 하고 물을 먹어보기도 하며 나무를 흔들어보기도 하지만 속시원히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로봇이 생각하기를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에서 출발 되었을까?’,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로봇 자신이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그 해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로봇이 처한 상황은 현재 인생들 앞에 놓여진 상황과 동일하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놓여졌으며 그 존재의 기원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약 70억 명 중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중에 과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의 노력은 매우 애처롭다. 로봇이 자신이 밟고 있는 흙을 파보고 자세히 보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을 한없이 쪼개어 보고 충돌시켜보고 분석해 본다. 국가들이 연합하여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만들기도 하며 우주공간에 망원경을 띄워 놓고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을 살피기도 한다. 흙을 아주 자세하게 분석하고, 멀리 있는 별에서 오는 빛을 분석해 본다. 그렇게 연구한다고 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복잡한 수식과 우주망원경으로 블랙홀을 연구한다고 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유리상자 안의 로봇이 벽을 두드리고 땅을 파헤쳐 보고 유리상자의 천정에 달린 별 모형을 아무리 뚫어지게 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바로 공자나 아인슈타인과 같이 인간 중에서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리상자 안에서 본질적인 것을 알아낼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 로봇은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식의 습득경로를 살펴보자.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는 경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유입되는 지식이다. 경험적 방법을 중시하는 귀납적 지식습득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유추하는 지식이다.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연역적 지식습득방법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인간이 일상적으로 연구하여 얻을 수 있는 지식습득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에 의해서는 결코 진리나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대한 유리상자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로봇이 제아무리 오랫동안 연구하고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거대한 규모의 연구를 진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자 안의 진리일 뿐이다. 평생 동안 물(水)만 연구한 사람, 곤충만 연구한 사람, 미생물만 연구한 사람, 분자들만 연구한 사람 등 수많은 자연과학자들이 오늘도 이 피조세계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연구한다. 이들 자신이 연구하는 것을 통하여 진리에 이를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학문을 연구하여 진리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아무도 없다.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대단한 진리를 발견하였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은 과학적 성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진리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리 연구하여도 진리에 이를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인간이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딱 한 가지 남아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위로부터 우리의 머리와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로봇제작자가 유리상자의 뚜껑을 열고 ‘너는 내가 만들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상자 내부에서 지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것이 안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상자에 갇혀있는 이 로봇은 제작자가 뚜껑을 열고 알려주기 전까지는 도저히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제작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알려 준다면,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아는 가장 명확한 방법이 될 것이다. 가로막혀 있는 천정 건너편에서 벽을 넘어 전달된 주인의 메시지가 바로 성경인 것이다. 현대과학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경은 우리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장 7절)
바로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 건너편에서 우리의 주인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귀를 기울이는 자는 이미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듣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들은 나중에 주인의 책망을 각오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화가 미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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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곽경도 박사 ((재)성경신학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이학박사) 이메일 : expa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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