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2-09-18 15:1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만물의 상대성-물질의 상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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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상을 기록하고 문명을 발전시켜온 이래, 인간은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격어 왔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전쟁의 역사를 통하여서 인간은 그렇게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정치와 정치제도의 변천사를 통하여서 인간의 간교함을 보았다. 그리고 사상의 변천사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바르다거나 확실하게 추앙할만한  사상을 발견하지도 못하였다.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모든 환경조차도 그렇게 자랑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이 별로 믿을게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말도 안 되는 일지만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이 물질조차도 상대적이다. 그 사연을 살펴보자.

물질 그 자체도 상대적이다.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 그 자체도 상대적이다. 물질이 있다면 전기적 성질이 완전히 반대인 물질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반물질(Anti-matter)이라고 부른다. 물론 반물질로 구성된 완벽한 반물질의 사람이 존재하거나 발견된 적은 없다. 이것은 반입자의 개념이 확장된 것으로서 현재 반(反)수소 정도를 합성한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인간의 생각과 같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반물질은 폴 디랙에 의해서 예견 되었는데 그 과정이 매우 극적이다.(그림 1) 현대과학을 대표하는 두 가지 과학이론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다.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고 양자역학은 플랑크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된 이론이다. 양자역학의 도입기부터 물질은 입자의 성질과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뉴톤이 물질을 입자로 생각하여 만든 것이 뉴톤의 운동역학이라면 슈뢰딩거는 물질을 파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물질의 본성을 철저하게 파동으로 생각하여 파동방정식을 만들어서 물질의 성질을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파동방정식은 몇 가지 태생적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파동방정식은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비대칭적이었으며 상대론적이지도 않았다. 상대론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식이나 모든 면에서 공간과 시간은 동등하게 취급되어진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시간과 공간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원자 이하의 입자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상대론적인 여러 가지 사항들이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무거운 원자의 경우 상대론적인 요소를 고려하여야만 분자의 결합길이 등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폴 디랙은 철저하게 상대론적 가정에 근거하여 새로운 파동방정식을 유도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디랙방정식이다. 이 디랙방정식에는 몇 가지 신기한 것이 있다. 전자의 스핀 항이 저절로 들어있으며 전하가 반대인 입자가 유도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반물질이다. 디랙방정식에서 유도된 이것은 나중에 실험에서 직접 검출이 된다. 놀랍게도 물질 그 자체도 물질과 반물질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엄청난 에너지를 내면서 사라진다. 만일 우리 주위에 반물질이 풍부하다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반물질이 내 몸에 닿으면 내 몸은 즉시 강렬한 빛을 발산하면서 소멸되고 말 것이다.(그림 2) 반물질을 내 주위에서 멀리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상대성

  우리는 이제까지 많은 것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에서 절대적으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공간은 없으며 우주 그 어느 곳도 ‘절대적으로 이곳에 세상의 중심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공간적으로 인간은 중심도 아닐 뿐 아니라 자기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시간, 상식적인 시간, 절대적 시간, 그러한 시간은 본래부터 없었다. 세상의 법도 누가 권력을 쟁취하였는가에 따라서 변하고, 아름다움의 기준도 그 시대의 사람에 따라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법과 세상의 기준이 날마다 변한다면 혼란스러워서 잠시도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싫다고 해서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상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부정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상대적 존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상대적 존재의 본질

  상대주의는 피조세계의 본성이다. 성경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확실히 드러난 이때, 일반계시를 통하여 피조계의 상대적 속성이 명백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을 뒤집어 보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기준이 되는 것도 없고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독립하여 상대적인 이 세상만 본다면 모든 것들이 실망스럽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변화하여 퇴락하여지고 없어질 것들이며, 아무리 고결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모두 잊혀 질 것이다. 역사 이래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며 비판받지 않은 사상이 없다. 해 아래의 모든 것들만 본다면 정말로 실망스러운 것 들 뿐이다. 이 세상에 이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가득 채워 두시고 실망하게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의 존재는 비록 피조물이지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주인의 즐거움에서 참여시키겠다고 하신다. 세상은 모두 상대적이고 한계가 있고 무의미한 존재들만 가득하지만, 절대자이신 그 분이 우리들에게 의미 있다고 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의미를 부여하신다. 절대자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우리는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말세에 하나님이 일반계시를 통하여 더욱 밝혀보여 주시는 것은 인생을 더욱 초라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심에 틀림없다. 인생들과 그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초라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 값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프지만 우리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음을 더욱 연구하여야 할 것이며 그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더욱 드러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곽경도 박사 ((재)성경신학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이학박사)
이메일 : expan@naver.com

화학적 진화론의 허구
만물의 상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