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현실 속의 서로 다른 두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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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날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현실 속에서의 생활이고 하나는 수면 속에서의 세상이다. 잠이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육체적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며 다음 날을 위한 각종 화학반응들이 우리 몸속에서 일어난다. 잠을 충분히 자야만 면역력도 강화되어 현실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꿈속에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맛본다. 공간의 이동이라든지 뜻의 전달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현실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꿈이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예고편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꿈속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눈뜨고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그 세상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동등하게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을 인식하게 된지는 이제 약 100년 조금 더 된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 세상은 분명히 현실세계이며 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실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가 성립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최근에 알게 된 이 세상이 현실의 세상보다 더욱 더 본질적인 세상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작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알려지기는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출발하였다. 막스 플랑크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신세계를 여는 선봉장이 된 셈이다. 우리 몸은 약 1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포들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종 단백질 등과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다시 아미노산 등과 같은 분자로 이루어진다. 이 아미노산과 같은 분자들은 원자들로 구성되어져 있고 이들은 다시 세부구조로 더 미세하게 나누어진다. 분자들의 세계는 흔히 ‘나노’라는 접두어가 붙는 매우 작은 세계에 속한다. 이 세상을 우리는 미시세계,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시세계라고 하자. 이 미시세계가 현실이 아닌 것이 아니다. 이 미시세계도 분명한 현실이다. 어찌 보면 이 미시세계의 확장이 우리가 거주하는 거시세계이므로, 이러한 미시세계가 오히려 본질적인 세상일 수 있다.
분명히 명시하지만 이 미시세계도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내 몸 안에는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고 하늘의 별들보다도 많은 세상이 있다. 나의 몸과 사물들은 이러한 미시세계들의 신비로운 하모니 속에서 형성되어져 있다.
이러한 미시세계는 정말 우리가 느끼는 상식과는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이 작은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 철저하게 파괴된다. 이 미시세계에서는 미시세계의 상식이 별도로 존재한다. 미시세계의 상식과 인간의 상식은 철저하게 충돌한다. 우리의 상식으로 절대 미시세계의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거시세계와는 철저하게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그 세상과 융화되어질 수 있다. 미시세계를 철저하게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이다. 그리고 미시세계를 생긴 그대로 인정하자는 사람들이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이다. 오늘날 역사는 아인슈타인학파의 철저히 패배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과학적 큰 흐름에서는 미시세계의 현상을 거시세계로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별도의 세계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 분기점이 되었다.
우리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이 물질들의 행동을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인 혼란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이다. 인간은 도저히 그럴 수 없지만 미시세계에서 하나의 입자는 동시에 여러 군데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인간이 집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의 현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간이 건물의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일층과 이층사이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중간계단을 통과하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갈 방법이 없다. 그러나 미시세계의 현실물질은 조금 다르게 행동한다. 일층에 있던 전자가 올라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이층이다(양자도약). 중간과정이라는 것은 없다(그림 1).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4차원, 5차원 혹은 11차원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차원이라는 것은 본래 공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자화 되어 있다’라고 한다. 물론 그 틈이 너무나도 적어서 인간이 거주하는 거시세계에서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전자가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벽을 그대로 통과할 수 도 있으며, 빛으로 정보를 교환할 수 없는 거리에서 자신들끼리 서로 엮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또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몸무게를 쉽게 바꾸어 버릴 수도 있으며, 짧은 순간 다른 존재가 될 수 도 있다(그림 2). 철저하게 인과론을 무시한다. 인과론이란 인문학과 자연과학에서 학문의 주요 원리이다. 인과론을 무시하는 학문이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이 관찰하는 모든 분야에서 인과론은 지켜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세계 속에서 즉, 작은 세계의 현실 속에서 인과론은 한낮 공허한 외침에 불과해진다. 엄연한 현실 속에서 인과론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진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생각과 사고가 너무나도 우리의 환경에 닫혀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다든지, 죽었다가 살아나신다든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 등을 많은 사람들이 비과학적이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성경이 신화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렇다면 그들이 알고 있는 과학의 상식으로 전자의 양자도약을 설명해보라. 그들의 합리적인 논리로 ‘전자의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함을(비국소성)’을 설명해 보라. 물질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라. 불확정적인 입자의 행동을 법칙을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라.
오늘날의 가장 과학적인 것은 가장 과학적이지 않다. 현대과학자들은 뉴톤역학을 고전역학이라고 비웃는다. 인간의 지성이 미약할 때 알고 있던 시대의 조각 지식으로 여긴다. 뉴톤역학을 들어 이 시대 최고의 과학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엄청난 냉소를 들어야 할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뉴톤역학적 사고의 과학이다.
오늘날의 첨단과학은 오히려 황당한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마저 ‘마지막 고전역학의 추종자’라고 따돌림을 받았다. 플랑크상수의 크기가 변한다면 미시세계의 요상한 현실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부활이라든지, 영원한 세상이라든지, 또한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들은 고전적으로 해석이 어렵지만 현대과학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들이다. 현실이 존재하는 것처럼 원리와 원칙과 법칙이 전혀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세상의 물리현상도 현실과는 다를 수 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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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곽경도 박사 ((재)성경신학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이학박사) 이메일 : expa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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