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거룩한 영 하나님
§ 12 Gott der heilige Geist (KD., 470-514)
Der eine Gott offenbart sich nach der Schrift als der Erlöser, d.h. als der Herr, der uns frei macht. Er ist als solcher der Heilige Geist, durch dessen Empfang wir Kinder Gottes werden, weil er es als der Geist der Liebe Gottes des Vaters und Gottes des Sohnes zuvor in sich selber ist.
1. Gott als Erlöser
2. Der ewige Geist (interessant: Abhandlung über das filioque)
한 분 하나님은 성서에 의하면 스스로를 구원자로서, 즉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주(主)로서 계시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는 성령이며, 그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니,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또 아들 하나님의 사랑의 영으로서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1. 구원자 하나님 2. 영원한 영(GG., 574, 박순경 역)
God The Holy Spirit
The one God reveals Himself according to Scripture as the Redeemer, i.e., as the Lord who sets us free. As such He is the Holy Spirit, by receiving whom we become the children of God, because, as the Spirit of the love of God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so antecedently in Himself.
거룩한 영 하나님(거룩한 영 신(神))
한 분 하나님은 성경에서 구속주로 자기를 계시한다. 즉 주(主)로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한 이는 거룩한 영이며, 우리가 그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영으로서 그는 자기 안에 먼저 있다(고경태).
우리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로 된 삼중구도를 제시하면서, 구속자(der Erlöser)를 성령으로 배치한 것에 대해서 지적했다. 정통 신학에서 구속주(Redeemer)는 성자 하나님께 부여된 것인데, 칼 바르트는 독자적으로 거룩한 영(der heilige Geist)으로 위치를 변경시켰다. 필자가 der heilige Geist를 성령으로 번역하지 않은 것은 바르트가 뒤에 der Geist(영)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der heilige Geist와 der Geist가 단순한 동의반복일 수도 있겠지만, 테제 문장이기 때문에 반복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영역(英譯)이나 박순경도 “성령”과 “영”으로 구분해서 번역했다. 그래서 필자는 der heilige Geist를 성령이 아닌 문자 그대로 “거룩한 영”으로 번역했다. 그것은 바르트가 제시한 der heilige Geist(거룩한 영)가 구속자(der Erlöser)이기 때문이다. 정통 신학에서 성령은 구속주 위치에 있지 않고, 구속주의 사역을 신자의 내면에서 시작하고 진행하는 사역을 한다. 그래서 바르트의 der heilige Geist는 “성령”이 아닌 “거룩한 영”으로 번역을 시도했다. 바르트는 성자를 화해자로 거룩한 영(성령)을 구속자로 바꾸었다. 바르트의 상상에서만 가능한 구조이다. 구속주의 위치를 변경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 전체를 바꾸는 것이다. 바르트는 바로 구속자 하나님(Gott als Erlöser), 거룩한 영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바르트는 거룩한 영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제시했다. 바르트가 말하는 자유는 어디에서부터 자유일까? 바르트는 죄인과 함께하는 하나님(Immanuel, with us sinners)을 주장했다(KD., 111, GG., 150, CD., 108).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에게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는 아니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자유는 언제든지 자기 뜻을 따라서 계시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영이 인간에게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는 테제 문장에서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 의미로 본다는 “모든 속박(억압)으로부터 자유”로 추측해본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정확한 문장을 찾아야 한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II권(창조론) 3부에서 악의 문제를 논의한다.
바르트는 성경에서 구속자로 거룩한 영을 계시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거룩한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제시했다. 동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 제시와 전혀 같지 않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세상에 오신 말씀)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명백하게 “참 빛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부여된다고 계시했다. 정통 신학은 믿는 자가 구주의 이름을 고백하며 부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사역하신다고 고백한다. 거룩한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령의 내주로 하나님의 자녀가 시작되는 것이 존재론적인데, 성경은 신자가 성령의 내주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바르트는 거룩한 영(der Heilige Geist)을 사랑의 영(der Geist der Liebe)으로 제시했다. 사랑의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영이다. 정통 신학에서 성령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영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거룩한 영을 사랑의 영으로 연결시켰다. 정통 신학에서 사랑과 자비는 아버지(misericordia Patris)에게 부착된 것이다. 바르트는 사랑도 거룩한 영으로 귀속시켰다. 바르트는 아들에게 있는 구속주, 아버지에게 있는 사랑을 거룩한 영으로 귀속시켜, 신학을 재편성시켰다.
하나님을 사랑의 영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유주의를 계승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을 “사랑”으로 재설정하여 가동하지 못할 때, 바르트가 가동시켜 운용되게 한 것이다.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4)는 1841년에 기독교의 본질을 출판했는데, 그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전환시켰다. 아돌프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도 기독교 본질(1899-1900)을 강의하면서 출판했는데, 기독교 이해를 “사랑”으로 재설정시켰다. 하르낙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바르트와 하르낙은 신학 논쟁을 했기 때문에 결별이라고 이해될 수 있지만, 바르트는 하르낙이 설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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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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