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의 영 이해
『교회교의학 I/1』 “§ 12. 영 하나님, 2. 영원한 영”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신경 3조(성령조)를 해석하여 리빌딩(rebuilding)한다. 바르트가 리빌딩한 산물을 신정통주의라고 하지만, 우리는 반기독교적(anti-Christianity)으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교의학 I/1』에서 바르트는 계시를 계시일원주의, 계시계속주의, 계시발생주의로 구도화했고, 삼위일체는 삼중일신 체계로 전환시켰다. 이는 “§ 12. 영 하나님, 2. 영원한 영”에서도 나타난다.
바르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작성 연대(325년과 381년)와 본문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 두 문서는 각각 제시되어야 법적으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 바르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문서를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본문을 재해석하여 자기 체계를 구도화했다. 그래서 신정통주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는 반드시 같을 수 없다. 신정통주의가 정통주의보다 좋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절대로 둘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혁신학은 정통신학과 같음을 추구하며 성경에 입각해서 더욱 개혁하는 것을 추구한다. 성경, 정통신학, 개혁신학은 같은 믿음을 추구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며 정진한다. 바르트는 성경, 신정통신학 가운데 위치한 정통신학을 재검토해서 해체하는 것을 목표한다. 그러한 구도를 mutatis mutandis(준용(準用)이라고 번역하고 있음, 조건이 다르면 적절하게 변화해야 함,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함)라고 한다. 개혁신학은 진리의 확정성을 견지한다. 진리의 확정성을 주장하면 닫힌 세계관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바르트 이후에 신 이해는 개방신론(혹은 열린신관, open-theism)이 구축되었고, 종교다원주의에 적합한 구도를 제공했다.
바르트는 계시 사건에서 거룩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 사건과 주관적 측면에서 Eigentliche Gottes selbst(the essence of God Himself,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본래적인)이 된다고 제시했다(KD., 489, GG., 598, CD., 466). 바르트는 성령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르트는 교리(Dogma)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3조를 제시하고 재해석했다. 참고로 바르트는 Credo라고 제시했는데, 신조의 문서에는 Credimus를 사용한다. 라틴 번역에서 Credo를 사용하는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다. 헬라어 Πιστύοομμεν은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같은데, 라틴 번역에서만 차이를 갖고 있다. 서철원 박사는 교리사에서 Credo에 {Credimus]를 첨가해서 제시했다(『교리사』, 377, Denzinger-Schönmetzer, 150). 김광채 박사는 Tanner, Decrees, I, p.24에서 Credimus 번역으로 제시했다(『고대교리사』, 424~425). 필자는 로마 교회가 사도신경의 Credo와 일치시키기 위해서 신조 첫 문장을 Credo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참고로 신조에서 Credimus는 한 번 사용한다. 박순경 교수는 헬라어는 “우리~”, 라틴어는 “나는~”으로 번역했다.
성령에 관련된 신조의 내용은 Et in Spíritum Sanctum, Dóminum et vivificántem: 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 Qui cum Patre et Fílio simul adorátur et conglorificátur:인데, 바르트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주시요 살리는 자시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받으시고 함께 영광받으시며”(서철원 번역)까지이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생략했다. 바르트는 헬라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필레오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1. 우리는 거룩한 영, 주님을 믿는다(Wir glauben an den Heiligen Geist, den Herrn, KD., 492, GG., 601., CD., 469). 바르트는 τὸ κύριον, Dóminum, Herr를 구분하면서, 거룩한 영을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주(Herr)가 아니라고 제시한다.“아버지와 아들은 인격의 의미에서 불려질 수 있으나 성령은 3의‘인격(als dritte Person)’이라고 불려질 수 없다”(KD., 493). 바르트는 복수 인격을 거부하는 것이 특징이다. 위격을 존재양식으로 전환시켰다. 바르트는 성령을“하나의 독립된 셋째 존재양식”(dritte Seinsweise, KD., 493)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여기에서도 반복해서 삼위(three person)를 거부하고 존재양식 구도를 밝히고 있다.
2. 우리는 생명을 창조하는 성령을 믿는다(Wir glau-ben an den Heiligen Geist, den Lebenschaffenden, KD., 494, GG., 604., CD., 471). 바르트는 거룩한 영의 신성(die Gottheit des Heiligen Geist)을 제시했다. 신조에서 성령은 신성(deity)을 추구하지 않고, 신격(divinitas)을 추구한다. 독일어 Gottheit는 deity와 divinity로 모두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역에서는 deity로 번역했다. 필자는 한국 신학에서 신성과 신격 이해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로 파악한다.“창조자 성령” 이해는 상당한 분별이 필요하다. 현대신학에서 창조자 성령을 생태신학으로 유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조에서 성령은 구속 사역을 위한 생명, 즉 죄에서 영생으로 옮기는 생명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거룩한 영이 창조와 자연(모든 사물)에도 외부에서(ad extra) 생명을 주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3.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현하는 성령을 믿는다(Wir glauben an den Heiligen Geist, den vom Vater und vom Sohne ausgehenden, KD., 496, GG., 607., CD., 473). 바르트는 신조의 procedit를 재해석해서 대체 개념, spiratio를 제시했다. 그리고 서방교회가 제시한 Filioque를 해석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통합시키는 구도를 제시한다. 바르트는 제한적으로 per Filium을 인정한 듯하면서, 수단적 원인(per causam instrumentalem)은 거부했다. 바르트는 외부 사역(ad extra)을 강조하면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개념을 도입시켰다.“세 위격의 페리코레시스”를“세 존재양식의 페리코레시스”로 전환시켰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의 내부적인 포레코레시스인데, 페리코레시스가 외부적인 교류가 가능하도록 구도화시켰다. 그래서인지 칼 라아너는 신의 존재 통보(God’s communication-self)를 제언했다. 라아너 신학으로 2차 바티칸 회의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구도화시켰는데, 종교다원주의의 효시를 칼 바르트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바르트는 이 부분 해석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4. 우리는 성령을 믿으니,“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함께 경배되고 찬양받게 되는 분이다” 여기서 고찰되어야 하는 그 신조의 이러한 구절도 성령의 신성을 규정한다(박순경 역, KD., 511, GG., 624., CD., 487). 바르트는 거룩한 영의 신성(Gottheit)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이 찬양받는 삼신론적 이해(simul der tritheistische Schein)를 벗어날 구도인 믿는 자에게 성화를 주는 셋째 존재양식으로서 신적 행위로 제한시켰다.
바르트의 성령 이해는 위격에서 셋째존재양식으로, 발출(prosesio)을 spiratio(숨쉼)으로, 구속사역으로 성령에서 만물에 생명을 주는 영으로 전환시켰다. 바르트가 구도화시킨 바르트의 신학은 정통신학을 폐기하고 새롭게 구축시킨 바르트의 구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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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
성경 66권에서의 두 여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