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성육신’ 개념은 없다
『교회교의학 I/2』 2권에서 2부는 “말씀이 육신이 됨(Die Fleischwerdung des Wortes)”이다. 바르트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제시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성육신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1부 “하나님의 말씀론”에서 정통 도그마(Dogma)인 삼위일체를 해체하고 삼중일신 구도로 재편시킨 것을 제시했다. 삼위일체 교리가 해체된 상황에서 전통적인 성육신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삼위일체가 없는데, 성육신이 존재한다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우리가 앞에서 이해한 바르트 이해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론을 전개하면서, 계시 안에 하나님 이해를 둔 것을 제시했다. “신(神)의 계시”가 아니라, “계시 안에 발생하는 신”의 구도였다. 김성삼 박사는 그러한 신 이해를 “행동하는 신”으로 제시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육신 교리(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 때문에 확정된 것이다. 1세기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고백이다. 기독교가 유대교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슐라이어마허가 “유일신 종교”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통합시키려 했고,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종교”로 묶으려 한다. 필자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람의 후손이라고 제시한다.
우리 학계에서 바르트에 대한 성육신 이해는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 벌코프 박사의 제시에서 혼선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벌코프 박사는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의 기적성을 인정하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새로운 출발점을 창조적으로 선정하신 증거를 발견하다. 그는 또한 이에서 교리적 의의를 찾아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죄의 유전은 부계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심으로써 피조성을 취하셨고, 동시에 인간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죄의 유전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적 중요성에 대한 의문에 대해, 만일 그 일에 모종의 목적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처럼 비상한 방식으로 출생케 하셨을 이유가 없다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벌코프, 『조직신학』, 이상원 역, 570)라고 제시했다. 위 문장은 바르트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한 문장일 것인데, 한국의 두 연구자가 바르트의 성육신 이해에 대해서 긍정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이상웅은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성육신이 있다고 발표했다(“루이스 벌코프의 칼 바르트 신학에 대한 평가”, 『개혁논총』, 25권, 2013년). 권호덕은 바르트가 “타락 이후의 몸-우리와 동일한 본성을 취했다”고 제시한 논문을 발표했다(“칼빈과 바르트의 성육신론”, 2013년). 권 교수는 칼빈에게는 타락 이전의 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밝히며, 바르트는 우리를 위해서 타락 후 몸을 취했다고 제시했다. 벌코프는 부계가 없기 때문에 죄의 유전을 모면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의 사역으로 무죄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 더 합당하겠다. 우리는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성육신이 없어야 논리적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됨”에서 전통적으로 성육신 개념을 부정하고, 바르트가 제언한 새로운 성육신 이해를 제시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교회교의학 I/2』 § 13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됨”과 “하나님의 자유”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바르트가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성육신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바르트는 성육신의 목적을 하나님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정통적으로 성육신의 목적으로 죄 때문에, 아담의 반역된 죄에서 몇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것으로 본다(참고. 서철원, 『그리스도론』, 46-47). 서철원 박사는 “오시안더가 성육신을 아담 타락 전 상태로 왔다고 주장했다”고 제시했다(서철원, 『그리스도론』, 48-49). 전통적인 신학 체계에서는 성육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보다,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구주로 고백했다(마 1:21-23).
『교회교의학 I/2』 § 13.1은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이다. 첫 문장에서 “삼중성(dreieinigkeit, 신준호는 “삼위일체에 관한 교의”로 번역)에 관한 학설(Lehre, 論)”이 성서적 증거라고 제시하면서 시작한다(KD., 1, GG., 15, CD., 1). 바르트는 여기에서는 삼위일체에 론(論, Lehre)을 합성하여 어쩔 수 없이 “삼위일체론(Trinitätslehre)”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 『교회교의학 I/1』의 번역자 박순경은 “Gottes Dreieinigkeit”를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했고, dreieinigkeit를 신준호는 삼위일체라고 번역했다. 필자는 “Gottes Dreieinigkeit”을 “삼중일신”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바르트가 정통 신학을 대체하기 위해서 새로운 어휘를 창안했기 때문에 매우 긴밀하게 생각해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좀 더 생소한 어휘로 번역해야 잘 이해될 것이다. 영역(英譯)은 Trinity를 Triune God으로 번역했다. 분명한 것은 바르트는 전통적 신학 어휘를 매우 체계적으로 거부하면서 그 자리에 자기가 창안한 어휘를 심고 있다. 다만 성육신은 동일한 어휘로 진행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 분류하는 형태로 재구성하고 있다.
『교회교의학 I/2』 § 13, “말씀이 육신이 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진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자(Versohner)로서 『교회교의학 IV』 권에서 매우 많은 분량으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교의학 I/1』과 『교회교의학 I/2』에서는 전통적인 신학에서 자기 신학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바르트가 제언한 개념은 계시의 생성 근원으로 아버지, 그 계시를 (우리를 위하여, für uns) 객관적으로 실행하는 아들, 그 계시를 (우리들 안에서, in uns) 주관적으로 실행하는 성령으로 제시했다. 동일하지 않은 존재방식과 행동방식 안에서 한 하나님인 구도를 제시했다(KD., 1, GG., 15, CD., 1).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 개념을 계시일원주의으로 제시했는데, 동심원의 중심은 객관성으로 아들이고, 동심원의 확장은 주관적 실행으로 성령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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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한나처럼 찬송한 마리아 |
뚜렷한 그리스도의 증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