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는 ‘전통적인 성육신’을 거부한다
Der Gegenstand, dem wir uns in Fortsetzung der mit der Entwicklung der Trinitätslehre begonnenen Analyse des Offenbarunggsberiffs zunächst zuwenden, ist die Lehre von der Inkanation oder von der Fleichwerdung des Wortes Gottes(KD., 3, GG., 17, CD., 3).
삼위일체론의 전개와 함께 시작된 계시의 개념을 계속하여 분석하는 가운데 우리가 우선 향하게 되는 대상은 성육신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심에 관한 교의이다.(신준호 역)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성육신’ 개념은 없다”고 제시했다. 그런데 위의 글만 보면 바르트에게 성육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준호의 번역에서 “교의”는 “Lehre(doctrine)”인데, “교의”나 “교리”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론(論)”으로 번역해야 한다. 신준호는 “삼위일체론(lehre)”으로 번역했다. 우리는 교의는 Dogma(독 Dogma), 교리는 doctrine(독 Dogmatik)으로 번역한다. 바르트는 이 차이를 알고 있으며, 교의학(Dogmatik)을 론(論, Lehre)으로 세워 탐구 과정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성육신도 론(論)으로 규정하여 탐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기독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자유(Freiheit Gottes)와 화해론(der Lehre von der Versöhnung)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론의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로 규정했다. “프롤레고메나”는 칸트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로 보이는데, prolegomenon(to say beforehand)의 복수이다. 서론(Introduction, preface, prologue) 등과 다른 개념이다. Prolegomena는 “서언(序言)”으로 구별하여 번역하는데, 바르트 번역에서는 “프롤레고메나”로 사용하고 있다. 바르트가 성육신을 하나님의 말씀론의 프롤레고메나로 제시하고 있다. 즉 계시 개념을 앞에서 삼중적으로 규정하였지만, 그 프롤레고레마는 성육신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육신은 계시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신 신비 중의 신비로 고백한다.
바르트는 다음 문단에서 “어떻게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수여되는 일이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현실로 되는가는 질문”으로 연결했다. 성육신을 하나님의 계시 수여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성육신 개념에 대해서 잘못된 궤변(Trugschluß), 이중적인 공상과 월권(der doppelten Einbidbung und Anmaßung)으로 은폐시켰다고 제시했다(KD., 4, GG., 18, CD., 4). 참고로 이준호 번역에서 중요한 오류는 Trugschluß(잘못된 결과, lurks the same fallacy)를 번역하지 않은 것이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개념에 대해서 잘못된 궤변을 인정한다고 했다(Anerkennung der Trugschluß). 그러면서도 긍정된 결과에 대해서 부정했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여 제외시켰다.
“비록 성서와 모든 전승된 교의들에 글자 그대로 아마도 가장 정확하게 조화된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이러한 길 위에서 승인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변경시키지 못한다.”(KD., 4, GG., 18, CD., 4)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이 독단(獨斷, arbitrary)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한 문장이 등장했다. 그것은 “정확한 결과(genaueste übereinstimmende Ergebnis dieses Prozesses)”라고 해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않아야 된다고 제시했다(noch würde er zu der von Gott geschaffenen Tatsache Ja sagen daraufhin).
바르트는 계시의 주체에 대한 질문에 한 분 하나님으로 규정하면서, 그 외의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주체를 아버지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한 하나님의 새로운 주권과 영광에 대해서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Zu neuer Erkenntnis der Herrschaft und Herrlichkeit des einen Gottes wird). 그것은 한 하나님의 자유이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는 독단적으로 계시를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으로 요청(Aufforderung)시켰다. 그리고 성육신을 객관적 계시 사건으로 이끌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를 강조하고 있다. 바르트가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테마를 극복했다고 제언하지만, 후기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성(The Humanity of God: Die Menschlichkeit Gottes)”을 주장했다.
신준호가 번역한 문장은 이해가 쉽지 않다. 신준호는 “우리는 계시를 첫째 영역 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둘째 영역 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향하는 운동으로 이해하려고 한다”(KD., 2, GG., 16, CD., 2)로 번역했다. 독일어는 ‘Man kann die Offenbarung im ersten Bereich als die von Gott aus zum Menschen hin, im zweiten als die von Gott aus zum Menschen hin gehende Bewegung verstehen wollen.’, 영역(英譯)은 ‘We might wish to regard revelation in the first case as the movement proceeding from God to man, in the second as that proceeding from man to God.’으로 번역되어 있다. 독일어에는 hin~hur 용법(hin 내 기점에서 멀어지는, hur는 내 기점으로 다가오는 느낌)으로 거리가 상이한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hin~hin을 사용하여 상호 차이가 없지만 순환하는 의미로 만들었다. 신준호는 문자적으로 두 번 하나님에게서 사람(von Gott aus zum Menschen)으로 번역했는데, 영역(Thomson, Knight)에서는 ‘from God to man과 from man to God’으로 순환 의미로 번역했다. 바르트는 첫째 국면과 둘째 국면에서 모두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했다. 둘째 국면에서 신준호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제시했다. 바르트는 하나님 계시 안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 내용을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으로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객관적이고 성령은 주관적이라고 바르트가 독단적으로 배정시켰다. 그 객관성의 시작이 “성육신”이 아니라 “성육신론(die Lehre von der Inkarnation)”이다. 바르트는 정통 신학에서 고백하는 성육신과 다른 새로운 성육신 이해를 전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을 빠르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 1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 1.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의 초반부에서 머물면서 전통적인 개념을 부정하고, 새로운 구도를 구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Dogma)를 론(論, Lehre)으로 규정하여 학문적 수준으로 검토와 수정이 가능하게 설정한 것이다. 성육신도 론(論)으로 설정했음을 밝혔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은 없다고 규정했다. 그러한 내용은 다음 독서를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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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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