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계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현실성과 가능성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2장 하나님의 계시, 2 부분 말씀이 육신이 되심, § 1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을 논한다. 우리는 “§ 13. 1.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에 대해서 상당히 제시했다. 그런데도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현실성(Wirklichkeit)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서를 진행하면서 현실성(Wirklichkeit, actuality)을 현존재(Dasein)로 이해하려고 한다. 나사렛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현실성과 가능성이다. 서양 철학에서 존재론과 인식론 연구에서 결국 탈(脫) 형이상학까지 전개되었다. 바르트까지는 칸트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에,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심층 구도에 놓은 것으로 필자는 평가한다. 바르트는 예수를 객관적 표상으로 세우고, 성령을 주관적 표상으로 세워서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객관은 외면이고, 주관은 내면이다.
우선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 마지막 부분에서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으로 분류했고, 더 나아가 유티케스와 네스토리우스로 분류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공교회에서 정죄된 위인이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에게 비교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또한 유티케스를 요한 계열로 네스토리우스를 공관복음 계열로 분류한 것은 더더욱 부당하다. 바르트의 진술을 여과시켜 이해하면 “유티케스와 네스토리우스도 틀리지 않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공교회에서 거부한 위인들을 루터와 칼빈으로 묶어서 처리한다면, 바르트는 이단도 정통도 아닌 어떤 신학 계열에 있는 것일까? 그래서 바르트는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y)라고 분류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신정통주의는 전혀 정통주의가 아니며, 정통주의를 계승하는 부류도 아닌, 말 그대로 “새로운 정통주의”이다. 우리는 개인이 세운 정통주의(A Privity orthodoxy theology, theologoumenon)를 따를 것인지, 공교회가 세운 정통주의(The Orthodoxy Theology)를 따를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루터나 칼빈은 공교회의 정통신학을 회복하려고 노력했고, 유티케스나 네스토리우스는 공교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교회 밖으로 나간 위인들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객관적으로, 성령(『교회교의학 I/2』, § 16.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을 주관적으로 배치시켰다. 최종호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읽기』에서 바르트가 사도신조를 3항으로 분류했는데, 1항 하나님, 2항 하느님-인간, 3항을 인간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정통신학에서 3조(혹은 3항)는 성령인데, 바르트는 인간으로 배치시켰다. 최종호는 “즉 성령 조항인 제3항은 하느님의 행위에 참여하는 인간, 즉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간을 문제 삼는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주격(Subjekt)으로서 성령은 나와 너와 우리가 사는 공동체 속에서 아파하며, 신음하며, 스며들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심에 있도록 한다”고 제시했다. 최종호가 제시한 “주격(Subjekt)”은 “주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바르트는 객관(Objekt)과 주관(Subjekt)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관과 객관 문제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는데, 칸트는 “주관의 내부에 객관을 인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정리했다. 즉 외부에 객관이 없다고 결론한 것이며,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가 인간 예수의 내면에 위치했다고 제시한다. 이것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을 단회적 현실성으로 분류했고(KD., 18), 기적(혹은 경이)이고 비밀(Geheimnis)로 제시했다(KD., 31). 예수 내면에 있는 계시를 “객관적”이라 규정한 것은 바르트의 개인적 신학 규정이다. 바르트가 계시를 외부에서 들어온 계시라고 규정하지만, 내면화된 계시(주관화된 계시)는 매우 민감한 주제가 된다. 서구 지성은 중세에 보편과 실재 이해를 놓고 결론 내지 못했고, 근대와 현대에 객관과 주관의 영역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교회교의학 I/2』에서 계시는 계시의 주체(1항), 계시의 객관성(2항), 계시의 주관성(3항)으로 분류한다. 이 분류법은 정통 신학이 분류한 아버지, 아들, 성령 분류법에서 바르트가 도출시킨 구도이다. 위거찬(「Karl Barth에 있어서의 계시와 종교(1)」)은 “계시의 주체로서 삼위일체”라고 했는데, 우리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는 독일어를 기록해 줄 것을 제언하고 있다. “Gottes Dreieinigkeit, Triunity”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계시를 객관과 주관으로 분류해서 『교회교의학 I/2』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 이해, 삼중적 체계를 계시일원주의, 계시계속주의, 계시발생주의로 정리했었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에서 삼중 계시를 계시자(성부), 계시(예수 그리스도), 계시 내용 혹은 계시됨(성령), 선포된 말씀(das verkündigte Wort Gottes), 기록된 말씀(das geschriebene Wort Gottes), 계시된 말씀(das geoffenbarte Wort Gottes)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교회교의학 I/2』에서는 계시자 하나님, 계시의 객관성(하나님과 인간), 계시의 주관성(인간-성령)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종호는 “1)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 창조자로서 하나님, 화해자로서 하나님, 그리고 구원자로서 하나님을 만난다. 2) 말씀의 성육신 속에서 계시의 객관적 진리를 만난다. 왜냐하면 그는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3) 성령의 부음은 계시의 주관적 진리를 만난다. 왜냐하면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라고 정리했다.
바르트는 계시의 현실성(Wirklichkeit)에서 가능성(Möglichkeit)을 전개한다. 가능성은 규범성이 아니다. 개혁신학은 계시의 규범성으로 성경을 확립했다(계시의 무오한 성격, 성경무오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계시의 규범성을 성경과 전례에 두었다. 이는 곧 바르트의 계시의 가능성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개념이 된다(바르트의 역동적 영감설). 존 맥아더 목사는 스프라울 목사가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베르카우어에게 수학할 때에, 베르카우어가 바르트의 성경 견해에 변화하는 것을 감지했다고 밝혔다(맥아더, 『성경 무오성에 대한 도전에 답하다』에서). 바르트는 축자영감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주장했다. 바르트는 계시가 발생하여 수납되는 구조를 “비규범성”이라고 하지 않고 “가능성”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도 자유로 예수에게 계시를 부여했고, 인간도 자유롭게 하나님에게 나가는 구조이다. 바르트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구도는 객관적인 예수를 모범으로 주관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구도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구도는 성령과 복음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관련논문]
황돈형, “신학의 실천적 진리개념의 가능성을 위한 바르트 계시이해 :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36집, 2013년
위거찬, “Karl Barth에 있어서의 계시와 종교(1)-『교회교의학』 제1부 제 2권(1938)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4권,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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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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