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계시의 시간 (2)
『교회교의학 I/2』 2장 2부분(말씀이 육신이 됨) “§ 14. 계시의 시간(Die Zeit der Offenbarung)”이다(KD I/2, 50-133, GG., 70-158, CD., 45-121). 우리는 Zeit, time을 시간(時間)으로 번역하는데, 정확한 의미로는 시(時)가 맞을 것이다. 시간(時間)은 시각(時刻)과 시각(時刻) 사이를 의미한다. 동양에는 전체 시(時)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시각과 시간 이해가 있다. 그러나 서양은 기독교의 사고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영원(永遠, eternal) 개념이 있고, 영원과 영원 사이를 Zeit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영겁(永劫)이라는 개념이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개념이다. “영원과 영원” 사이라고 할 때에 오해할 소지가 있는데, 영원은 단절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과 시간이 다른데, 영원 안에 시간이 있겠지만, 시간 안에 영원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순하게 Zeit를 ‘시간’으로 사용한다. 세상 경륜(economy)을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야 한다. 공간에 대한 이해는 기하학이다(geometry, 幾何學). 시간에 대한 이해는 근대에서 대두된 추상적 개념이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시간 이해는 인간의 복잡성이 반영된 산물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인간학(Anthology)’이라고 규정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바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하나님의 인간성>(The Humanity of God; Die Menschlichkeit Gottes, 1956년)(신준호 역, 새물결플러스, 2018)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재하는 사건 안의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이러한 사건 자체 안에서 성취된 시간이다. 그 시간은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구약성서적인 기대의 시간이며, 그리고 신약성경적인 기억의 시간 또한 증거의 시간이다.(신준호 역)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사건 자체 속에서 성취된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사건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구약성서적인 시간으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는 신약성서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의 시간으로 존재한다.(김재진 역).
God's revelation in the event of the presence of Jesus Christ is God's time for us. It is fulfilled time in this event itself. But as the Old Testament time of expectation and as the New Testament time of recollection it is also the time of witness to this event.
Gottes Offenbarung in dem Ereignis der Gegenwart Jesu Christi ist Gottes Zeit für uns. Sie ist die erfültre Zeit in diesem Ereignis selbst. Sie ist aber als sie alttestamentliche Zeit der Erwartung und als die neutesatamentliche Zeit der Erinnerung auch die Zeit des Zeugnisses von diesem Ereignis.
바르트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는 Ereignis(event) 사건, Zeit(time) 시간이다. 사건이 시간 안에 발생했고, 시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역사(Geschichte)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에서 신비를 갖는 독특한 종교인데, 300년 박해 기간 후에 제국의 종교가 되어 세계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어떻게 비기독교화가 되어도 일주일 구도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시간은 기독교적이다.
Gottes Offenbarung in dem Ereignis der Gegenwart Jesu Christi ist Gottes Zeit für uns.
Gegenwart(presence)는 번역(현재, 현존)에 차이가 있는 이해가 어려운 개념이다. Gegenwart는 ‘직면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는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에 1-30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trans. E. C. Hoskyns(NY: Oxford Press, 1972), 29). 예수의 죽음의 해를 30년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그때 출생한 해를 BC 4년으로 보는데, 바르트는 AD 1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직면한 상태라고 규정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면한 사건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1-30년 동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는 것을 확증하면서, 그것은 우리의 사건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신(神)이 인간을 위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파악한 것으로 세우고 있다. 그 인과관계를 밝히지 않은 것이 바르트의 특징이다.
Sie ist die erfültre Zeit in diesem Ereignis selbst.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은 사건 자체 안에서 성취된 시간이다.”, 앞에서 제시한 내용이다.
Sie ist aber als sie alttestamentliche Zeit der Erwartung und als die neutesatamentliche Zeit der Erinnerung auch die Zeit des Zeugnisses von diesem Ereignis.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은 구약성경적 시간의 기대의 시간 그리고 신약성경적인 기억의 시간 또한 사건에 대한 증거의 시간이다.” 바르트는 자기 증거가 성경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바르트는 성경 전체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고, 그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해한 것이다. 성경 전체에 하나님의 시간 그리고 시간 안에 있는 사건이 있다. 구약은 기대의 시간이고, 신약은 기억의 시간(기억해야 할 시간)과 기억한 사건에 대한 증거의 시간으로 정리한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할 대상 혹은 내용으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가 이러한 대상을 인정하는 것이 보수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불교적 사고에서 모든 대상을 부정하는 무상성(無常性, impermanence)이 유럽에 전이되면서 현대정신을 형성시켰다. 유럽에 불교를 포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이다. 우리는 불교 정신을 기독교로 포장한 유럽 사람에게 배우는 형국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바르트는 대상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교적 표현으로 집착(執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를 잇는 학자들에게서는 그 대상성이 즉각 사라졌다. 인간에게 집착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을 위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운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다음 세대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칸트와 약 200년 간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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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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