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계시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교회교의학 I/2』 2장 2부분(말씀이 육신이 됨) “§14. 계시의 시간(Die Zeit der Offenbarung)”은 1.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2. 기억의 시간, 3. 기대의 시간으로 구성하였다. 바르트는 “계시와 시간”을 동일한 의미로 진행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47. 시간 속에 있는 인간(der Mensch in seiner Zeit)”이라고 규정한다(KD III/2, 524-616, GG., 506-593).
바르트는 먼저 계시는 사건 안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서(Gottes Offenbarung in dem Ereignis), 다음 문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한다(Gott offenbart sich/Gods reveals Himself)”라고 반복한다. 바르트에게 신은 행동 안에 있다는 개념(Gott ist in seiner Tat)을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한다”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한다”로도 이해될 수 있다(KD I/2., 50, GG., 70, CD., 45).
바르트는 다음 문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시간을 가진다(Gottes Zeit für uns)”는 것으로 계시 이해를 진행한다. 전(前) 문장과 후(後) 문장이 동일한 의미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테마 문장 Gottes Offenbarung in dem Ereignis der Gegenwart Jesu Christi ist Gottes Zeit für uns(예수 그리스도가 직면한 사건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다)를 본문에서 그대로 진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der Gegenwart Jesu Christi)”는 술어 역할을 한다.
바르트는 시간과 계시(Zeit und Offenbarung)를 대두시키는데, 필자는 “포괄과 협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시간을 창조하였고 창조 전체를 포괄하며, 그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계시 사건이 된다. 시간 안에서 계시가 발생한다. 이 계시 발생은 하나님의 자유이지만 전적으로 인간의 작용이 되기도 한다. 바르트의 시간 개념(des Begriffs dieser Zeit)에는 시간(Zeit)과 계시 시간(Offenbarungzeit)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하이데거(Heidegger)는 시간 개념(Der Begriff der Zeit)으로 사용하였다. 바르트의 시간 개념은 우리를 위하여(für uns) 준 시간이고, 신과 인간이 만나는 구도를 시간으로 규정한다. 그 시간 안에서 계시로 인간에게 인식된다. 인간이 신을 인식할 때에 신은 인간에게 인식된다(상호침투).
바르트는 정통 신학 명제 Deus pro nobis non sibi(하나님은 자기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를 시간과 결합시켜 자기 논제로 이끌고 있다. 바르트는 die Zeit seiner Offenbarung(계시의 시간)과 die Zeit der Offenbarung(계시의 시간)을 구분해서 사용하였다(KD I/2., 50, GG., 71, CD., 45).
바르트는 “특수한 시간의 특수한 개념(Voraussrtzung des besonderen Begriff deeser besonderen Zeit)”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비교는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역사와 계시를 일치시키기 때문에(Offenbarung als Geschichte) 특수한 시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시간에 특수한 개념을 부여하는 기술이 있는지가 신학에서 중요한 분별점이다. 바르트는 계시계속주의이기 때문에 특수성이 모든 시간과 지역에 산재하게 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시간과 공간)에 특수성을 부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성취 이후에는 계시에서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어거스틴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연장’으로 이해한 것을 인용하면서, 시간 안에서 발생한 계시를 탐구(혹은 측정)할 수 있을 것으로 연결시킨다. 사람의 언어로 표현되었다면 해석할 수 있다는 개념과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 안의 사건이나 인간의 언어 표현을 모두 해석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인류에는 불가사의한 행위의 결과(Seven Wonders of the World)가 많이 있다. 바르트의 이성주의를 단정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시간, 영혼, 기억, 기대 등에 대한 세계와 인간의 신비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계몽 시대부터 인간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은 세계는 부정하였다(예: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신학의 제1명제는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인데, 유한이 무한을 파악한 도식에 대한 도식이다. 정통신학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심으로 알 수 있는데,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인간이 인식된 사건을 계시라고 하고, 하나님의 행동과 자유를 인식하도록 한다. 정통신학은 바울처럼 주 예수를 믿어, 구속주와 창조주를 알아 무한한 겸손을 정진하고,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인식하지만 그 지식의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이다.
바르트는 어거스틴을 따라 “하나님을 시간의 창조자와 섭리자(Gott den creator et ordinator temporum)”로 제시한다. 비교. creator sit temporum et ordinator, De Civ, 11, 6인데, 어거스틴은 “시간과 질서의 창조자”라고 제시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르트는 어거스틴과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을 융합시켰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과 관련된 시간이다(Sein und Zeit, 1927년).
바르트는 시간의 창조주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까지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KD I/2., 52, GG., 72, CD., 47).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 실존 사이에 “타락(Sündenfall)”을 놓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타락된) 그리고 “제삼의 시간(dritte Zeit sein)”을 제언하였다(KD I/2., 52, GG., 73, CD., 47). 바르트는 왜 “우리 시간(unsere Zeit)”이 타락인지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참고> 권호덕은 “칼빈과 바르트의 성육신론”(한국개혁신학회 한국칼바르트신학회 공동학술심포지엄, 2013년)을 발표하였다. 권호덕은 성육신한 예수가 “타락 후 아담의 몸”을 취하였다고 바르트의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아담의 타락이 역사적인 사실일 때 그러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바르트는 에덴동산이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등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사가(Saga)라고 규정하였다. 바르트는 단순하게 “우리의 실존과 하나님이 창조한 실존 그 자체 사이에 타락이 놓여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창조된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타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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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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