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0-11-27 20: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시간


『교회교의학』 I/2(황준호 역), § 14. 계시의 시간(Die Zeit der Offenbarung)은 성취된 시간, 기대의 시간, 기억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 14. 1.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에서 성취된 시간(Erfuellte Zeit)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구약을 기대(기다림)로 신약을 기억으로 규정하였다.

Gottes Offenbarung in dem Ereignis der Gegenwart Jesu Christi ist Gottes Zeit für uns. Sie ist wie erfüellte Zeit in diesem Ereignis selbst. Sie ist aber als die alttestamentliche Zeit der Erwartung(기대, expectation) und als die neutestamentliche Zeit der Erinnerung(기억, 추억, recollection) auch die Zeit des Zeugnises von diesem Ereignis(§ 14. 명제문장).

우리는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를 시간의 성취 사건”이라고 밝혔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바르트의 독단(Barth's own authority)으로 정리하였다. § 14. 2. Die Zeit der Erwartung(구약, GG., 101-136), § 14. 3. Die Zeit der Erinnerung(신약. GG., 136-158)으로 전개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와 시간을 연계하여 논리를 추진하면서, 시간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로 규정하며 계시 사건을 진행하고 있다. 계시 사건이 발생한 현재에 성취된 유일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것은 바르트의 독단적 규정이고, 기독교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탄생 이전(ante Christum natum)의 시간을 언급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된 시간이고, 구약성경의 시간은 계시를 기대하는 시간이 된다(GG., 102). “구약성경은 계시의 참된 기대의 증거이다”로 제시하였다. 바르트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고유성을 언급하면서, 바벨론, 페르시아와 함께 옛 게르만의 전승을 함께 제시한다. 바르트는 이스라엘 역사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하였다(GG., 102, KD., 78: Die Geschichte Israels hat solche Eigenschaften wie die Geschichte jedes Volkes die ihrigen hat). 역사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은 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점이다. 바르트가 이스라엘의 고유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 있는데, 다른 국가의 고유성을 동일하게 인정하기 때문에 다원주의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historische와 Geschichte를 사용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Geschichte(게쉬히테)는 eine Frage des historichen Werturteils(단순한 역사 가치판단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신준호 번역에서 historische와 Geschichte를 ‘역사’로 번역하고 있고, 영역(英譯)에서도 history, historical 등으로 구분하지 않고 번역하였다. historische와 Geschichte는 바르트 이해와 현대신학에서 중요하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시공간으로 이스라엘을 계시의 기대 혹은 기대된 계시의 공간으로 평가한 것이다(GG., 102-103). 바르트의 구도로 보면 계시를 기대하는 공간, 예수를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든 공간을 ‘기대’로 평가할 수 있다. 바르트는 구약성경 밖의 계시까지 포괄하는 이해이다. 바르트는 시간이 성취되기 전 기대의 시간을 은폐성으로 규정하였다(Verborgenheit der geschichtlichen Offenbarung). 그 계시의 은폐성이 깨뜨려지는 신약에서도 계시 자체는 동일하다. 바르트는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로 규정하면서, 구약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가 공개된다고 제시하였다(GG., 103).

바르트가 진행하는 예수 찬가는 매우 감동적이다.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고 즐거워한 것(요 8:56), 이사야 선지자가 주의 영광을 본 것(사 6:9), 누가복음에 있는 마리아 찬가(눅 1장)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기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억하며 기뻐하는 상태이다. 바르트는 구약성경을 거부하는 2세기 말시오니즘과 16세기 소시니아니즘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바르트는 하르낙,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레네우스, 어거스틴, 칼빈, 루터로 연결 지었다. 바르트가 규정하는 방식은 부당하다. 하르낙이 이해한 예수는 인간 예수이고, 이그나티우스 등은 예수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믿었다. 우리는 어떤 부당한 진영을 거부한다고 해서 정당한 가치를 얻는 것이 아님을 훈련한다. 바르트는 가룟 유다, 아리우스 등에서 회의를 주장하면서, 구약성경의 정경성을 부정하는 말시온과 소시니안을 배격하는 것은 부당하다. 바르트는 누구도 배격하지 않지만, 정확하게 배격하는 것은 다신론자, 우상숭배자, 삼위일체 신봉자이다.

바르트는 아담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den glauben an Christum)”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하였다(GG., 110). 바르트가 아담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한 것이 멋진 표현이다. 그러나 기대하는 그리스도인과 추억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에 차이가 없다. 바르트는 루터파 신학자와 칼빈과 개혁자들이 동일한 고백이라고 규정하였다(GG., 111). 그러나 바르트의 규정은 옳지 않다. 루터와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강조하였고 동일한 믿음의 대상을 밝혔지만, 실체로 오신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차이를 갖고 있었다. 루터와 칼빈 후기 개혁파에서는 두드러지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서철원 박사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드러나도록 신학 하도록 훈련한다. 그 이유는 십자가 구속제사가 드러나는 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den glauben an Christum(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황준호, 그리스도를 믿음)은 쉽지 않은 용어이다. 로마서 3장 22절, 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를 루터는 durch den Glauben an Jesum Christum으로 번역하였다. KJV는 by faith of Jesus Christ라고 번역하였는데 명료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라고 개정한 번역도 있다. 바르트는 den Glauben을 den glauben으로 번역하였다. 톰 라이트는 faith를 faithfulness로 번역하였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정통 루터파적 견해와 칼빈과 개혁파들의 견해를 반복하는 것처럼 표현하였다(GG., 111).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은 것은 동일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Logos asarkos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가 영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의지 안에 있는 것이지 Logos가 실체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루터나 칼빈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구주는 성자 하나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성자 하나님을 믿음이다. 성자 하나님을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유일한 복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1)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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