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종교 vs 인간적 종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종교 vs 인간적 종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디를 선택하겠는가?
두 요소를 질문하고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질문에는 깊은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에서 오류를 범한 경우가 상당하다. 그중 하나는 에밀 브루너와 칼 바르트의 자연신학 논쟁에서 누구의 견해가 우리의 견해인지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려고 했다. 그래서 칼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인정하는 브루너의 견해에 대해서 ‘아니오(Nein)’라는 외침에 긍정했다(참고. 에밀 브루너와 칼 바르트, 『자연신학: 에밀 브루너의 자연과 은혜와 칼 바르트의 아니오!』, 김동건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1)). 고경태는 “칼 발트와 죤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 총신대 박사논문(2007)에서 에밀 브루너와 칼 바르트의 계시 이해는 개혁신학 진영에서 모두 받을 수 없다고 제시했다. 이상한 질문에 대해서 정상적인 답변은 질문자가 유도하는 함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상한 질문을 만났을 때는 질문에 대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 바리새인, 헤롯당 등이 이상한 질문,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시도했지만 빠져들지 않았다.
우리는 바르트가 자기 선생인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을 떠났다고 생각하는데, 바르트의 글에서 하르낙에 대한 존중은 쉽게 찾을 수 있다. GG 353에서 “하르낙이 말했듯이~”라고, 하르낙에 대한 긍정적인 계승을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르낙이 전쟁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지 사상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하르낙 다음에 슈트라우스를 제시한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개혁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교회교의학』에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 사상을 거부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의 사상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바르트는 슈트라우스가 “기독교의 초자연적 계시를 변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GG., 353).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Gottes Offenbarung)를 강조한다(GG., 353-354). 바르트는 기독교, 종교를 “인간적 현실성과 가능성”으로 규정한다(GG., 354). 바르트는 먼저 폐쇄된 종교를 거부하고 참 종교를 지향하고 있다. 그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 인간적 가능성과 현실성에 기반한 종교라는 것이다. 확정(깨달음)과 문제를 제기하는 이중적 가능성(doppelten Möglichkeit)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종교들 가운데서 하나의 종교로 이해되어야 한다(Die Frage, die damit aufgeworfen ist, daß Gottes Offenbarung auch als eine Religion unter Religionen zu verstehen ist)는 주장은 바르트에게 있는 종교다원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학, 교회 그리고 믿음(Theologie, Kirche und Glaube)에 대해서 제시한다(GG., 354). 바르트는 신학, 교회 그리고 믿음이 갖는 특수성을 밝힌다. 종교가 하나님을 만나고, 연합하는 것을 취급하기 때문에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Begegnung und Gemeinschaft mit Gott를 “하나님과 만나고 연합하는 인간이 가진 문제”, 영어는 his encounter and communion with God으로 번역했다. Gemeinschaft는 슐라이어마허가 교회를 규정한 어휘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제도 교회(Kirchentum)와 참 교회(Gemeinde)를 구분했다. Gemeinschaft는 쉽지 않은 어휘이다. 영어로 communion으로 번역했는데, community로 번역한 사례도 있다.
바르트는 신학, 교회, 믿음이 자기 주체적 대상을 포기하고 비워지도록 함으로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GG., 354). 신학, 교회, 믿음이 포기되어지고 하나님의 계시가 채워지는 구도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적 종교로 전이되는 구도가 있는 것이 적지 않은 문제다. 그래서 인간의 하나의 종교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바르트의 역설적인 표현이 있다. 바르트는 기독교가 일반종교와 동일 혹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명확한 명제로 제시하지 않는다. 슐라이어마허는 유일신 종교를 고등종교로 분류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묶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세 종교의 범주에서 더 확장시켜 종교들을 묶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특수성을 단호하게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제언하는 종교는 그 안에 기독교 등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포괄주의(inclusive pluralism)이다. 바르트가 주장하는 종교는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자기가 구상시킨 종교이다(Reification, 구상화, 물상화物象化, Versachlichung, 객관화, 대상화).
바르트는 신학, 교회, 믿음이 자기가 규정하는 하나님의 계시(현실성과 가능성)가 아닌 체계에 대해서 지양한다. 신학, 교회, 믿음이 인간적 종교, 종교적 단체, 형식적인 인간적 경건성의 형태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시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결단(Entscheidung, decision)이다. 결단은 현대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어휘이다. 폴 틸리히에게서는 존재의 용기와 함께 결단이 강조된다. 이들의 사유는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의 ‘결단’에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제언하고, 단계를 도약할 수 있는 것은 실존의 결단으로 제시했다.
참고로 정태홍 목사는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을 전적 타자(wholly Other)로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 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주장했다.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보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되어 현대주의 신학자들이 수용한 개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차이(qualitatively infinite difference)를 강조하기 때문에 개혁신학처럼 보이지만 동시성 원리(同時性, Gleichzeitigkeit)로 신인합일로 이끄는 구도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의 계기를 통해서 동시성을 소유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영원과 시간 이해 구도이다.
바르트는 매우 힘든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현대주의적 개신교주의, 16-17세기의 뿌리, 18-20세기의 관계이다. ※ 신준호 번역에 18-20세기가 빠져 있는데, 현대주의적 개신교주의는 18-20세기 개신교로 볼 수 있겠다. 바르트가 18-20세기로 규범화시켰다면 슐라이어마허, 자유주의 신학과 자기를 동일한 범주로 묶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현대주의적 개신교주의에서 좀 더 특별하게 계시를 종교로 규정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계시’를 강조하는 신학자로 평가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종교라면 종교의 기초가 무엇일까?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종교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기독의 종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기독의 종교에서 계시의 종교로 전환시키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이 기독론 중심적이라고도 평가되는데,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신학을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론이 아닌 신중심 신학으로 보아야 한다. 바르트가 그리스도를 매우 반복적으로 제시하지만 계시자가 아닌 계시 내용으로 그리스도는 객관적 계시에 불과하다. 사람은 주관적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 계시로 종교를 이뤄야 참 종교라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에서 참 종교는 정통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성경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종교 vs 인간적 종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그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고 답하면 된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영원한 복음인 천국 복음 |
통치섭리의 시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