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구정통주의에서 바르트 정통주의로
칼 바르트는 GG I/2., 355-363쪽에서 옛 종교에서 참된 종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가 말한 참된 종교는 옛 종교가 아닌 계시로부터 나온 믿음이다. 바르트가 말한 문제점은 옛 종교에는 계시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바르트의 계시를 우리는 “계시일원주의, 계시발생주의, 계시계속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가 ‘삼중적 형태(dreifachen Gestalt)’이고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했다(계시발생주의). 계시의 삼중성은 세 동심원의 중첩으로 일원적이다. 그리고 계시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고 발생하는 계시발생주의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계시는 성경의 충족성에 근거해서, 계시가 중지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록된 계시인 구약과 성경 혹은 율법과 복음으로 규정한다. 바르트는 “선포된 말씀(the preached Word)”, “기록된 말씀(the written Word)”, “계시된 말씀(the revealed Word)”으로 세 양태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선포된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선포된 말씀을 계시와 동일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개신교주의를 발전을 주도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바르트가 자유주의를 극복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지 않은 바르트의 진술이다. 바르트는 신개신교주의를 높게 평가한다. 우리는 바르트도 슐라이어마허의 그늘에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새관점학파에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신학을 전개하는데, 그 범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이고, 슐라이어마허가 유일신론으로 범주화시킨 용례이다. 슐라이어마허, 라이마루스의 자유주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근거는 칸트와 스피노자로 보인다. 바르트는 신개신교주의자들을 “자유로운 진리 연구의 대변자”로 생각하며, 200년 신학사에 일관성을 보인 명제(命題)를 거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불쌍한 모습으로 규정했다(GG., 363-364). 바르트가 표현한 명제는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박사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그래서 반틸 박사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라는 체계로 바르트의 체계에 응전했다. 바르트가 규정한 명제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명제를 세우는 전제가 다름을 밝히는 것이다. 반틸 박사는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바르트의 행동하는 하나님과 전제가 다름을 밝혔다(김성삼, “행동하시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5).
바르트는 칸트의 도덕주의,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의 신학, 포이에르바하의 환상주의(투사), 스트라우스, 바우어, 하르낙, 부세트의 성경비평학과 종교사학파의 상대주의 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바르트는 보수주의에서 두려움으로 저항하면 결국 패배라고 강변했다(GG., 364).
바르트는 구개신교주의(구정통주의)와 신개신교주의를 사용한다. 신개신교주의는 200년의 신학 기간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다. 우리는 바르트의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자세를 보았다. 바르트는 구정통주의, 칼빈 신학에 대해서 명확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최근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프란체스코는 “사제의 혼인과 여성의 사제” 진출에 대해서 논의를 중지시켰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WCC에 관심을 두고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은 교회는 결코 말, 합리성으로 운영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자유로운 진리 탐구”를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다(GG., 366).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소유로부터의 관점과 다른 관점 아래서 인간을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GG., 366). 포이에르바하(1804-1872)는 헤겔(1770-1831) 좌파로 <기독교의 본질>(1841년)에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주장했는데, 바르트가 그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현대신학에서 신학은 신이 아닌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학으로 전환되었다.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Ⅲ부(4권)에서는 언약의 대상자로서 인간이 거주하는 창조 공간에 대해서 제시한다. 바르트처럼 창조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 신학자가 없는데, 인간의 거주 공간에서 발생하는 계시에 대해서 설명하는 인간 이해 부분이다. (참고, 정재현, <신학은 인간학이다>, 분도출판사, 2003).
바르트는 계시와 종교를 한 체계로 묶는 것을 거부한다(GG., 367). 종교 안에 계시가 있는 것을 종교가 계시를 결정하려는 태도로 이해했다. 구정통주의는 계시와 종교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GG., 367). 그러나 바르트는 종교 아래 계시를 두는 것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시작되고 계시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바르트는 계시와 종교를 비교 대상으로 놓지 않는다.
바르트는 계시에서 인간이 간과되는 것을 제언했다(GG., 368). 바르트의 주장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리스도교적 종교와 인간적 종교를 구분하면서, 전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신앙의 유비를 비신학적 사고 체계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론적인 사고로서 성육신적 사고를 제언했다(GG., 370). 성육신을 하나 됨의 완성된 사건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성육신적 사고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됨이 완성된 사건”으로 제시했다. 칼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끈, bond)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한 몸(Unio cum Christo)이 된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과 연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주이고, 성령이 구속주가 된다. 정통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이시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끈이다.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강조한 것은 종속주의적 경향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최근 반(半) 아리우스주의로 현대적 종속주의가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 회중교회에 유니테리언 사상이 그들의 사상이 되었다. 바르트의 삼위일체 이해는 종속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의 요약으로 내용을 마치겠다. “우리는 계시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적 종교의 세계의 한가운데에 현재하셨다는 인식으로부터 아무것도 삭제하거나 유도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현재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계시와 종교의 개념들 사이의 질서가 양자 사이의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저 사건과 동일시되어 이해되는 방식으로써 제거된다는 것인데,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 곧 심판하시며 그리고 홀로 의롭게 그리고 기록하게 하시는 인간의 주권과 스승으로서의 하나님, 인간은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인간, 곧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선하심을 통하여 취하여지고 수용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육신을 취하심의 그리스도론적 교리에 대한 기억 안에서 그리고 이 교리의 의미에 적절한 적용 안에서 우리는 계시를 종교의 지양으로 말하게 된다.”(GG., 370-371).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성령의 主목적 |
왜 4복음서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