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 신학의 좌파와 우파
필자는 이전에 칼 바르트 신학에서 좌파와 우파를 제언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제시하며 바르트 신학의 흐름과 상황에 대해서 제시하려고 한다. 먼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게 좌파와 우파가 있는 것은 학문화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균진 교수가 <헤겔 좌파 연구>(새물결플러스, 2023, 960쪽)를 출간했다. 헤겔의 사람들은 크게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구분된다. 헤겔 우파는 헤겔의 철학적-종교적 전제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자들이고, 이와 달리 헤겔 좌파는 헤겔의 사상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자들이다. 헤겔 우파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반면, 헤겔 좌파는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 때문에 헤겔 좌파에 속한 인물들은 공적 활동이 크게 제한되었으며, 따라서 부득이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 자유 문필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들 헤겔 좌파에 속한 인물들은 19-20세기에 인류의 정신사와 문명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다. 헤겔 철학은 기본적으로 절대정신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관념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다. 이에 반해 헤겔 좌파에 속한 사상가들은 현실 세계의 개별성, 물질성, 구체성, 심미성 등에 더욱 부착했다. 이와 더불어 19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자연과학의 성과 역시 정신보다는 물질세계에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헤겔 좌파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헤겔 좌파를 대표하는 네 인물, 포이어바하,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니체가 있다. 앞에서 우리는 키르케고르를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했는데, 김균진은 헤겔 좌파로 분류했다. 다른 연구자는 헤겔 우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만큼 키르케고르에 대한 사상적 분류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키르케고르의 사유체계가 칼 바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칼 바르트에게도 좌파와 우파가 있다는 것을 제언한다. 칼 바르트도 결코 가벼운 학자가 아니다. 그의 강력한 위치는 좌파와 우파로 나뉜 학풍에도 있을 것이다. 서철원 박사는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박사 논문,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중보자 직임(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 각주에 칼 바르트의 신학에 기독교 전통적인 삼위일체가 없다고 제시했고, 그 내용은 논란 끝에 유지되어 박사논문 승인을 받았다. 그 논문은 쿰 라우데(Cum Laude; * Summa, Magna)를 수상했고, 튀빙겐 대학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논문에 선정되었다. 박사논문 부심에 바르트의 직계제자인 헨드리쿠스 베르크호프(Hendrikus Berkhof, 1914-1995)가 있었고, 서철원의 칼 바르트에 대한 제시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베르카우워(Gerrit Cornelis Berkouwer, 1903-1996)도 강하게 항의했지만 바르트의 신학 전개에 대해서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칼 바르트에 대한 연구로 김성삼은 칼 바르트의 신 이해는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행동하는 하나님이라고 밝혔다(김성삼, “행동하시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5). 고경태는 “칼 발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7)에서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안티정통주의라고 제시했다. 칼 바르트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철저하게 해체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 바르트에 대한 변호적 연구가 계속되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특히 칼 바르트의 스캔들(1991년 유족들은 바르트-투르나이젠 서신들을 더 감추지 않고 공개함)이 밝혀짐은 칼 바르트에 대한 연구가 긍정적인 방면과 부정적인 방면에서 모두 약화되었다. 연구가 약화되지만 영향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
칼 바르트 신학에는 좌파와 우파가 있다(고경태). 우리나라에는 우파적 성향이 절대적으로 많다. 바르트 우파는 칼 바르트를 정통주의 반열에 올리려는 경향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존 칼빈과 칼 바르트를 비교할 때에 최소한 동급으로 아니면 칼빈보다 월등한 신학자로 평가한다. 한 예로는 칼빈의 예정론과 바르트의 선택론을 비교하면서, 바르트의 탁월성을 제시한다. 둘째, 칼 바르트의 사상적 변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개진한다. 존 D. 가세이가 <바르트 사상의 변화>(김희은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1)를 제시했다. 이와 유사한 패턴의 석, 박사 연구논문들이 상당히 있다.
그리고 좌파적 성향의 연구가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칼 바르트를 사회주의 사상가로 평가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바르트의 사상에 변화가 없다고 평가한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신학을 회복한 신학자인가? 분명한 것은 자유주의와 칼 바르트의 현대신학은 같지 않다. 그것을 극복하고 더 개혁된 산물인지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자유주의는 이성의 자유와 가능성에 근거해서 신학하는 것이다. 현대신학은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인정하는 복잡한 구조이다. 당시에 불확정성의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 1927년)가 태동하기도 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진리 규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 즉 현재 인식하고 있는 상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규정한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성으로 진리를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어서 진리규정의 대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초는 칸트의 진리정합설(coherence theory)에 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서양에 비해서 진리불변성이 많은데, 칸트 철학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칼 바르트 신학을 알아야 하는가? 칼 바르트 신학이 목회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복음을 명확하게 안다면 칼 바르트의 신학의 유무에 대해서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을 명확하게 아는 것과 칼 바르트의 신학을 명확하게 아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전자는 은혜의 산물이고 후자는 인간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은혜의 산물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알 수 없고, 인간의 산물은 인간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어도 복음의 요체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즉 칼 바르트의 신학을 아는 것이 더 쉽다. 노력하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의 위력은 복음을 알지 못하면 혹 미숙하면 반드시 칼 바르트의 신학으로 신학하고 설교한다는 것이다. 잡초와 알곡의 차이는 잡초는 거름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라는 것이고, 알곡은 주인의 세밀한 관리가 없으면 죽는 것이다. 자연상태로 놓아두면 바르트의 신학은 우후죽순이 되고 은혜신학은 고갈된다. 은혜신학은 하나님께서 기르신다. 칼 바르트의 신학을 꼭 알아야 하는데, 노력하면 알 수 있기도 하다. 바르트의 신학을 연마하는 것은 곧 복음을 아는 훈련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복음을 명확하게 안다면 칼 바르트의 신학의 맹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서철원 박사가 제시한 칼 바르트의 신학에 “삼위일체가 없음”에 대한 제시를 보았다. 이것은 칼 바르트의 직계 후예들이 인정한 내용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칼 바르트의 신학에 명확한 제시 때문에 거부할 수 없다. 칼 바르트의 신학에 “삼위일체가 없음”에는 “죄와 십자가 피의 구속의 은혜”가 없다. 그리고 “성육신”도 없다. 이것은 진리 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한 조건만 인준된다면 모든 조건은 인준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교리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둘 때가 있다. 전택설과 후택설에 대해서는 두 조건을 모두 용인하려고 한다. 전택설을 부정하기 때문에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반드시 성육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칼 바르트에게는 성육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성육신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데, 중요한 것은 전통적 방식으로서 성육신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칼 바르트의 성육신 제시는 전통적인 방식의 성육신이 아니다. 그가 동정녀 마리아를 말하고 성육신을 말해도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계시의 현실성(Reality(realitas, Wirklichkeit) of Revelation)으로서 성육신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예수 이해에는 죄인으로서 예수가 제시된다.
칼 바르트 신학이 한국교회에 왜곡되어 이해된 것은 미국 메이천 박사와 박형룡 박사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메이천 박사는 칼 바르트에 대해 구체적 진술이 없다. 메이천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변호한 위대한 신학자이다. 박형룡은 칼 바르트의 성경 이해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박형룡 박사가 비판한 내용은 정확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다(is)’와 ‘~되다(become)’의 문제이다. 서철원 박사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 삼위일체가 없음을 밝혔다. 김성삼 박사는 칼 바르트의 신 이해는 “존재가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밝혔다. 우리는 그 외에도 여러 문제들을 밝히고 있다.
바르트 우파는 정통신학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바르트를 평가하며, 바르트 우파는 기독교사회주의 학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두 공통점은 정통신학의 가치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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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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