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칼 바르트 약전(略傳)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필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넘지 못할 산인 것도 확실한 것 같다. 결국, 학도에게 필요한 것은 우공이산(愚公移山) 정신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학문 세계가 다 그런 것 같다. 거대한 산맥을 만났을 때, 마가가 타우루스 산맥을 보면서 선교 여행을 포기했을 수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가가 보기에 넘지 못할 산이었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 산을 넘어 로마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했다. 바르트는 진짜 넘지 못할 산일지 모르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그 영향력에 함몰되고 말 것이다. 바르트 산맥에서 돌아서나 피해서 로마, 서바나로 결코 갈 수 없다.
필자는 바르트가 제공한 가장 큰 가르침은 ‘삼위일체 유일신관’을 포기하고 ‘일신론’을 체계화한 것이다. 칼 바르트 신학이 삼위일체론이 아닌 것은 서철원 박사의 사상이나 필자의 학위논문 “칼 발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2007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학위논문에서 ‘칼 발트’로 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칼 바르트’로 전환하고 있다.
칼 바르트에 대한 약전은 기본 이해를 위한 것이다. 명료한 연대순이 아니라 그의 삶의 전환점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 개혁파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마지막 주자인 하르낙, 헤르만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911년에 자펜빌에서 목회했다. 그가 목회할 때 사회주의운동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빨갱이 목사’로 평가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다. 많은 발티안들은 사회주의에서 떠났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의 마지막 저술이 <하나님의 인간성>(1959년)과 처음 <로마서 주석, 초판>(1919년)과의 연계성에 대해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연구들이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독일 지성인 93명이 전쟁 지지 선언을 했는데, 자유주의 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바르트는 그 모습을 보고서 자유주의와 결별을 결심하고, <로마서 주석 초판>을 출판했고 시대를 바꾸는 계기를 이루었다. <로마서 주석 2판>(1922년)을 로마 교회 신학자 칼 아담이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평가했다.
바르트는 많은 학문 동지와 만남과 헤어짐을 가졌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와 ‘자연신학 논쟁’을 한 것이다. 뒤편에서 다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할 것이다. 통상 브루너는 자연신학을 인정했고, 바르트는 부정했다고 이해한다. 필자는 브루너는 자연에서 일반계시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트는 자연에서 특별계시가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한다. 논쟁은 1934년부터 시작해서 20여 년을 진행했다.
바르트는 1927년 독일 굉팅겐과 뮌스터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1930년 본 대학에서 본격적인 신학과 저술 행보를 했다. 바르트에게 ‘특유 문체’가 등장했다고 평가하는데, 1929년 여비서 샤르로테라(Charlotte von Kirschbaum, 1899-1975)가 함께 거주하며 연구했다.
바르트는 1932년에 <교회교의학> 집필을 시작했다. 1927년 <기독교교의학구도>를 집필하다가 <교회교의학>으로 전환했다. 5권(서론, 하느님론, 창조론, 화해론, 성령론)을 계획했지만, IV 단계, 총 13권(1968년, 36년 약 9,400페이지)으로 미완성 체계이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항거한 고백 교회의 ‘바르멘 선언문’(1934년)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래서 바르트를 나치 정권의 항거자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바르트는 추방되어 바젤로 귀환했고, 본회퍼(Karl Bonhoeffer, 1906-1945)가 나치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바르트는 독일에서 1946년에서 1947년까지 교의학을 강의한 뒤, 바젤 대학으로 돌아와 사역했다. 바르트는 모차르트 음악 전문가로 1956년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 기념식에 강연하기도 했다. 1962년에 미국 프리스턴 대학에서 강연했다. 바르트는 로마 교회 2차 바티칸 회의(1962-1965)를 확인하고 로마 여행도 했다. 1968년 12월 10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르트의 묘지는 바젤에 있다.
우리나라에 1924년(갑자년) ‘묻지마라 갑자생’이 있고, ‘58년 개띠’가 있다. 바르트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경험했고, 1950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을 먼발치에서 경험했다. 세계역사의 대변혁 축을 감당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로 기독교 신학계는 1980년에 한 번의 대 변혁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칼 바르트 사상은 흔들리지 않았고 변혁자들은 바르트의 그늘 아래에 있다. 필자는 바르트가 제공하는 ‘유일신-일원론적 사고’라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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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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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칼 바르트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