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8-03-19 19: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바르트의 신인식 방법: 신앙 유비(analogia fidei)


바르트 신학을 탐구하면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식 구조(메커니즘)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어떻게 신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교회교의학 I/1>에서 진행하고 있다. 계시는 <교회교의학 I권, I/1, I/2>에서 제시하고 있음을 밝혔다. 바르트의 계시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가 없는 “단일 계시”이다. 필자는 바르트의 계시가 ‘단일 계시’이고, ‘그 계시’에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된 가치가 진리이기 때문에 “계시일원주의”라고 규정했다. 사람은 인식된 범위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식된 범위에서 인식되지 않는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하도록 계시가 훈련시킨다고 생각한다.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은 무지(無知)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지(知)’이고 절대로 인식할 수 없지만 가장 ‘확실한 진리(眞理)’라고 수립했다. 소크라테스부터 “무지의 지(無知의 知, docta ignorantia)”는 가장 참된 지식으로 규정했다. 중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독일)가 신인식 구도에서 확실하게 확립했다. ‘아는 지식’은 바로 ‘모르는 지식’을 생산한다. ‘모르는 지식(무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바르트, 현대철학은 “판단 불가(agnosticism)” 혹은 “가치 없음”으로 규정했다. 현재 교회가 있음은 ‘아는 것’이고, 그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 ‘모르는 지식(무지)’이 확립하는 것이 구도가 된다. 정통 신학은 ‘아는 것’을 붙들고 경배하도록 유도하는데, 칼 바르트는 ‘모르는 지식’으로 향하는 것이다. 지식의 원리가 확실한 지식을 근거로 불확실한 지식으로 가는 것이 있는데, 바르트는 역(逆)으로 확실한 지식은 불확실한 지식에 근거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고 합니까?”라는 질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룬다. “당신에게 대한 확실한 지식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준다. 그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바르트는 계시가 발생함으로 신지식이 발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계시발생주의). 그리고 그 도구를 믿음(fide)으로 규정했다. ‘믿음’이 도구인 것은 칼빈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원리(계시)’는 같지 않지만 ‘도구’가 같은 일이 발생했다. 그럴 때 도구가 같은지를 구분하는 것이 분별 훈련이다(참고. 고경태의 <영분별을 위한 신학좌표>는 분별을 위한 훈련의 한 방편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믿음’과 칼빈이 말하는 ‘믿음’이 같을까? 바르트는 계시를 인식하기 위한 인간 의식 작용이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선물이다. 그 선물이 인간 의식을 작용시킨다고 보아야 하고, 그때 성령이 말씀으로(per verbum) 양육하신다(cum verbo). 참고로 믿음과 신앙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믿음은 ‘믿다’에서 전성어미 ㅁ을 붙여 명사로 만든 것이고, 신앙은 앙(仰, 우러를 앙), 종교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동의어로 교차 사용한다.

바르트는 신앙유비(analogia fidei)를 강조하여 말하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한 신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존재유비(analogia fidei)를 배격하고 신앙유비로 신학함을 도식화시켰다. 바르트의 신앙유비는 안셀무스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프로슬로기온>을 연구하면서 확립했다고 한다. 바르트는 이 원리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삼위일체론을 해체시켰다(Vestigium Trinitatis으로 규정함). 후대들은 ‘신앙유비’를 넘어서 “성령론적 해석”이라는 더 모호한 개념을 제시하기도 한다. 학문을 판단 가능한 범위로 규정한 바르트의 제시는 유효하다. 후기 바르트주의는 판단 불가능한 것까지 신지식으로 규정화하려 하고 있다. 바르트의 학문은 검증을 추구하고, 검증 가능한 지식을 취득했을 때(드러난 하나님) 감추어진 하나님이 폭로된다.

존재유비는 신을 대상으로 놓고 인간 혹은 자연으로 유비해서 탐구하는 방식이다. 현대철학에서 인간 앞에 놓인 대상은 인간과 동일하거나 속한 존재로 규정했기 때문에, 현대신학에서도 신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존재유비는 대상 지식을 탐구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바르트가 수용해서 신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차안으로 신앙유비를 제언했고, 바르트가 말하는 신앙은 대상화를 거부하는 방편으로 신앙이다. 대상화(objectification)가 이루어지면 우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르트는 언급하지 않지만 구상화(visualization)를 진행하게 된다. 구상화에 대해서는 정태홍 목사(가조제일교회)가 <내적치유와 구상화>라는 저술에서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의 신앙유비는 대상 지식을 거부하는 진행이다. 그리고 대상 지식을 이교적이고 다신교로 규정한다. 바르트가 ‘신앙’을 말하며 강조하기 때문에, ‘나의 신앙’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독교 믿음은 실체(實體)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믿음의 사람)이다. 종교개혁은 중세로마교회가 교회를 믿고 의지하도록 훈련하는 것을 배격하고, 주와 구주이신 예수를 믿어 교회를 이루도록 개혁했다. 그런데 18세기 개신교는 계몽철학의 영향을 수용하여 자유주의를 이루었고, 20세기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현대철학을 결합시켜 현재 시대를 개방시켰다. 현재 우리 시대에 모든 성향은 ‘믿음’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영. everything depends on the mind, 화엄경)은 불교를 넘어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성향으로 자리 잡았다. 그 범위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문장은 일체유심조의 완곡한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행동(Gottes Sein in der Tat, <교회교의학> §28, 1. 행위 속에 있는 하나님)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산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행동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으로 희생과 헌신을 추구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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