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로서 성육신 전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5. 계시의 비밀(Das Geheimnis der Offenbarung)에서 전통적 그리스도론을 해체하고, 바르트가 전제에 근거한 자기 체계를 형성시키고 있다. 바르트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으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을 구성하려고 한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문장 안에서 말씀이 주어이다.
바르트의 생성(발생, Werden/becoming)에 대한 개념이 드러난다. 문장으로 주어가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주어에 대해서 말해질 때(발화/發話) 주어가 행동하고 주어에 관해서 생성된다. 바르트의 독단(獨斷)이 등장하는데, 인간에 의해서 발화(發話)될 때에 창조가 생성된다는 전제이다. 이러한 형태를 신의 주권적인 통치 행위라고 규정했다(GG., 173). 바르트는 창조 이해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체계를 채용한다(GG., 173-174). 슐라이어마허는 창조와 섭리를 일치시키는 특징이 있다. 바르트는 창조 그 자체는 주권적으로, 그것과 구분된 창조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규정을 “타락한 인간 역사에 들어온 특성의 생산물로 규정하지 않는다(Nein).” 그리고 하나님의 일반적 통치 행위로 처리하고 있다. 바르트는 성육신 이해에 뜬금없는 창조 이해를 도입시키면서 이해를 진행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창조 이해는 섭리에 연속성을 두는 것이다. 처음 창조(initial creation)와 연속창조(creatio continua)로 제시했다. 바르트도 슐라이어마허의 창조와 섭리 이해를 답습하고 있는데, 슐라이어마허는 창조에서 죄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Sünde nicht ernstlich problematidiert). 즉 바르트에게 성육신 이해에서 죄 문제는 심각하지 않다. 서철원 박사는 어거스틴의 고백(O Felix Culpa mea)을 따라서, 성육신의 동인을 죄(罪)라고 제시하였다. 성육신 이해에서 죄와 관련하지 않는 구도는 상승기독론(Aufstiegschristologie)의 전형이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이 생성은 말씀의 신적인 자유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바르트는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을 세계 과정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제시하며 아버지, 아들, 영의 필연성으로 두지 않지만, 신의 내적 자유로운 행동으로 생성(발생)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바르트는 창조를 파괴 구조로 평가하고, 그 창조 세계에서 자유롭고 선한 신적 의지로 창조된 기적, 생성의 기적(das Wunder dieses Werdens/the miracle of this becoming)으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서 아타나시우스와 안셀름의 견해를 가져왔다.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는 왜곡하여 인용했고, 안셀름의 견해는 답습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죄의 결과로 파괴된 창조를 회복하기 위해서 로고스의 성육신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안셀름은 성육신의 필연성을 죄에 의해서 무한하게 손상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 이해는 니케야 신경의 고백을 정확하게 세운 것이다. 즉 homoousion(동일실체)을 고백하지만, 바르트는 그 견해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안셀름이 제시한 죄로 파괴된 세계의 회복을 위한 성육신 이해를 반복했다. 안셀름의 성육신 이해는 함축적인 개념이고, 아타나시우스의 개념은 너무나 명확한 개념이다. 바르트가 말씀이 육신이 되심(성육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사역, 피조물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 것은 죄와 관련성을 회피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피조 세계 회복이란 포괄적인 개념이 아닌,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길로 밝혀야 한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어서 말씀은 이러한 생성과 생성된 존재 안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우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는다.
바르트는 성육신을 과거(said)로 제시한다. 즉 현재 성육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제시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서 생성(발생)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다면 신적인 자유를 일으킨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까지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학자는 칼 라아너(Karl Rahner, 1904-1984)이다. 라아너는 성육신을 신의 존재 통보라고 규정했다. 여전히 성육신이 계속되고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제2바티칸 공회의(1962-1965)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채용한 칼 라아너는 전통적인 예수 믿음과 이해 방식을 완전히 전환했다. 라아너는 정통 이해의 성육신 교리를 신화로 취급했다(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226). 신(神)의 자기 통보(Geschehen der absoluten Selbstmitteilung)를 성육신으로 이해했다(FCF, 189). 바르트는 예수를 원형(原形, archetype)으로 간주하고, 라아너는 심볼(symbol)로 간주한 것이다.
바르트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문장의 주어와 술어에서, 주어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유도한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술어인 “역사적 예수”에 서고 넘어지며, 신성 없는 그리스도에 집착했다고 비판했다. 말씀과 육신의 관계를 주장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진술처럼 보인다. 바르트는 개신교에서 예수를 “종교적 영웅”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신격화”로 세웠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GG., 178). 우리는 비판에 근거해서 자기 정당성을 세우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정당한 주장이 아니면 그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바르트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양자를 모두 비평한다. 그래서 바르트가 개신교와 로마 교회와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WCC를 통해서 로마 교회와 교류 혹은 연합으로 가고 있다. 바르트가 비판한 개신교 진영에 종교적 영웅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다.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the 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의견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형성시킨 문서에 의해서 결정된다. 바르트는 어떤 기독교 문서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 견해로 자기 사상을 구축시키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의 사상에 근거해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문서화시켰다. 개신교는 교파마다 각각 자기 믿음을 공적 문서로 작성하여 채택하여 유지하며, 예수의 이름을 고백하며 증거한다.
4. 어느 정도까지는 말씀의 성육신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 대하여 다음이 또한 시험이 될 것이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목과 같이 다 연결된 성경 |
창조와 관계 깊은 심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