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5-10-21 15:1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Wirklichkeit는 ‘현실(現實)’로 번역

칼 바르트 어휘 파악하기(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공부할 때에 “게쉬히테(Geschichte)와 히스토리에(Historie)”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와 바르트의 대화에서 게쉬히테에 대해서 소통이 되지 않아 단절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 게쉬히테를 질문하는 반틸 박사를, 바르트가 무시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반틸 박사는 ‘전제주의’를 구성하여 바르트주의에 대해서 진을 펼쳤다. 반틸은 객관적인 진리에 기반을 두고 질문했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계시 외에는 어떤 인간적 기반도 인정하지 않았다. 반틸 박사와 바르트는 전혀 다른 기반에서 서로 토론을 펼쳤기 때문에 일치될 수 없었다. 근대 시대에는 유사한 기반 체계에 있었지만, 현대 시대(1900년대)에는 전혀 다른 기반 위에서 사유가 진행되는 구조가 되었다. 그 현대 시대의 기독교 사유 체계의 기초를 세운 위인이 칼 바르트이다. 철학계에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꾼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이 시작되었다. 『계몽의 변증법』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가 공동 집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 출판했다. 이 사상에 대해서 송다니엘이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해설』(토브북스, 2022)으로 비평했지만 대중에게 쉽게 파악되지 못한다. 먼저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오 마르크시즘에 대한 거부의식은 많은데, 네오 마르크시즘의 핵심 요체 사상이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틸 박사는 성경 계시를 명확한 진리로 보았지만, 바르트는 성경에 메이지 않는 신학을 구사했다.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명확한 진술(Propositional Revelation: 전제주의)’로 보았다. 즉,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역사적 사실이든 교리적 진리든) 오류가 없으며, 객관적인 진리의 기반이자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성경을 ‘계시의 증인(Witness to Revelation)’으로 보았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책 그 자체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주체적으로 임하는 사건으로 보았다. 그 사건을 진리(교리)로 보았다. 바르트는 교리는 들려오는 소리를 합당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신에 관한 교회의 말함(Rede von Gott, talk about God)에 대한 기독 교회의 자기 검증으로 개념화했다. 이러한 말함(Rede, word)에서 추구된 올바른 내용을 교의(Dogma)라고 칭한다고 했다(GG., 37). 바르트에게 교리(Dogma)는 기록된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함(Rede)에서 발생한 올바른 내용이 된다. 올바른 규범은 기록이나 객관이 아닌 개인의 주관으로 배정되게 된다. 주관이 절대화될 수 없고,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상대주의와 절대관용 시대가 된다. 객관을 말하는 것은 억압과 혐오가 된다. 아무리 적은 숫자일지라도 객관을 말하면 폭력이 된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대한 이해는 극적으로 차이가 발생한다. 반틸의 에덴동산 이해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Historie)이지만, 바르트에게 에덴동산은 구원론적 사건(Geschichte)과 신화적 서사(Saga, 사가)이다. ‘사가’란 신화(Myth)처럼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탐구(Historie)의 영역을 초월하지만 진리를 담고 있는 독특한 서사 형식을 의미한다.

<참고> 한종희 박사(92세, 1931-2022)는 약 45년간 칼 바르트의 신학을 연구하며 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비판하고 분석했다.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2).

​“게쉬히테(Geschichte)와 히스토리에(Historie)”를 사용하는 바르트의 의도를 반틸 박사는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신학교에서도 “게쉬히테(Geschichte)와 히스토리에(Historie)”를 언급했을 뿐 명료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게쉬히테의 언덕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신학의 시간과 사건 이해를 명료하게 하지 못했다. 우리는 18-19세기 독일 철학자들의 사유 체계를 쉽게 넘지 못하고 있다. 80여 년의 대한민국 철학계에서 상당한 이해가 개진되어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번역을 답습하던 수준에서 상당히 발전해서 우리 사유 체계로 그들의 이해에 미치는 수준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계에서는 답습하는 수준에 있다. 그것은 그들이 사용한 어휘를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훈련이 약하기 때문이다. 철학계는 어휘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하려는 연구자들이 있고, 그들이 존중받는다. AI는 “Historie(히스토리에), 자연 과학적, 경험적, 객관적인 시간-공간 속의 사실을 연구하는 역사학적 영역. 그리고 Geschichte(게쉬히테),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구속사적 사건,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체적으로 행하신 의미 있는 사건의 영역”으로 제시했다.

​바르트가 “게쉬히테(Geschichte)와 히스토리에(Historie)”를 사용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어휘가 Wirklichkeit(비어클리히카히트)이다. 이 어휘를 영어번역자가 Reality로 번역했는데, Reality에 대응되는 독일어는 Realitat(라틴어 Res)가 있다. 바르트를 연구한 지 20여 년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 한 단어 때문에 고생했다. 분명한 것은 Reality로 영역한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된 것이었다. 우리 번역에는 현실과 현실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현실(現實)이라는 개념이 모호했다. Wirklichkeit가 Actuality로 번역되는 것이 좋게 생각되었다. Reality는 실재(實在)이고, Actuality는 실제(實際)로 번역되기 때문에, 필자는 Wirklichkeit를 실제(實際)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AI의 기능이 활성화되자 Wirklichkeit에 대해서 AI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Actuality에 대응되는 독일어가 Aktualitat(라틴어 Actus)가 있었다. Reality에 대응되는 독일어는 Realitat(라틴어 Res)이다. 그럼 Wirklichkeit를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야 할까? “독일어 **“Wirklichkeit”**를 영어로 번역할 때 가장 일반적인 번역은 **“reality”**입니다. 하지만, 철학적 맥락이나 미묘한 의미 차이를 강조해야 할 때는 **“actuality”**가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AI Gemini). AI는 실재와 실제를 포괄하는 어휘가 ‘현실(現實)’이라고 한다. 现实(중), 現実(일)도 같은 어휘로 번역하니, Wirklichkeit는 ‘현실(現實)’로 일치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말 <교회교의학> 번역자들은 “현실(現實)과 현실성(現實性)”으로 번역하고 있다.
‘실재(實在)’와 ‘실제(實際)’는 객관적 가치(Reality, Being)와 주관적 가치(Actuality, Experience)로 분류하고 싶다. 실제는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이 실재와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끊임없이 유지되었고, 현대에서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고 합의되기 때문에, 주관화, 상대화가 되었다.
그런데 Wirklichkeit는 실재와 실제를 포괄하는 어휘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개념이다. Wirklichkeit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Realitat, 실재)을 넘어서 이념(Idea)이 작용(Wirken)하여 실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이라는 번역어는 실재와 실제의 역동적인 통합이다. 이 개념을 헤겔이 체계화했고, 바르트가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점은 역동적으로 통합되었다고 평가를 할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헤겔은 ‘절대정신’, 바르트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결국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우리는 판단을 규범적 문서를 근거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상적이거나 피상적인 개념은 자기 주관을 객관화시킨 독단이다. 그 독단을 관용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폭력에도 합법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Wirklichkeit를 미국에서 번역한 Reality에 대해서 Actuality가 좋겠다는 생각에 ‘실제’로 제언했다. 작용(Wirken)하여 실현된 상태이기 때문에 가변적이고 생성되는 Actuality(실제)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Wirklichkeit는 좀 더 복잡하게 실재와 실제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그 개념에 합당한 어휘가 ‘현실’이라고 하니, 그 어휘로 수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현실(現實)’은 ‘현재(現在)’와 다른 “실제(實際)가 구현되는 상태 혹은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실체(실재)와 경험된 주관(실제)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지만, 순서도 중요하다. 순서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실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것이 현대주의이다. 그러나 교회 정통파는 진리의 실체에서 주관적 경험이 허용되는 구도가 된다. 이 순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말과 마차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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