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칼 바르트의 계시 이해: 드러난 그리고 감추어진 하나님
신학의 제일명제는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notitia vera Dei). 개혁신학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의 자기 현시(自己顯示, self-manifestation, manifestatio Dei)라고 한다. 계시(revelatio)라고 하기도 한다. 신학에서 “manifestatio와 revelatio”는 “현시(顯示)와 계시(啓示)”로 구분해서 번역하고 있지만 쉽게 구별하기 어렵다. 혹 현현(顯現)이라고 하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전달하는 내용 출처에서 두 가지(들음과 봄)를 제시한다. 필자는 현현은 일반계시로, 계시는 특별계시로 구분해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두 가지(duplex cognitio Dei)가 있는데, 창조(일반계시)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구속(특별계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개혁신학에서 신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수준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음과 무한정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 바르트 신학은 칸트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을 수용해서 대상 지식이 아닌 인식 지식으로 전환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인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위키백과). 개혁신학과 칼 바르트 신학이 크게 다른 것은 ‘대상 지식을 다루는 것’과 ‘인간이 인식하는 지식을 다루는 것’이다. 칼 바르트 계시 이해에서 바르트가 추구하는 계시는 인간이 인식하는 범위를 다루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칸트 철학을 반복해서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수용된 수준만을 계시 수용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각 개인 각자마다 다른 방식, 다른 때, 다른 내용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유일한 계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 바르트 신학이 갖는 보수적 성향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뿐이고, 참인간이라고 하는데 정통신학이 말하는 무흠(無欠)한 인간이 아닌 자연 인간을 강조한 표현이다.
바르트는 인간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난 하나님(Deus revelatus, comprehe-nsibilis)’과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 incomprehensibilis, 은폐성)’으로 구분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개념은 바르트에게 없다. 드러난 하나님과 감추어진 하나님은 루터가 이사야 45장 15절 주석(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에서 사용한 것이나 바르트가 루터의 개념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에게는 특별계시 개념이 명확하고,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대상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두 왕국 이론(regnum Christi et regnum mundi)은 루터 신학을 대변한다. 루터는 성경과 신앙에서 명백하면서도 모호한 것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Duplex est claristas scripturae, sicut (et) duplex obscuritas). 바르트는 루터의 신학 용어를 상당히 많이 차용하는데 긍정적인 개념으로 변용시켰다. 반면 칼빈의 전개한 신학 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바르트 신학과 루터 신학을 연계해서 연구한 저작물은 거의 찾지 못했고, 바르트와 칼빈을 우호적으로 연계한 연구물들이 많다.
바르트의 계시 이해인 ‘드러난 하나님과 감추어진 하나님’ 개념은 ‘선택론(Erwaehlung-slehre)’에서 다시 등장한다. 앞에서 제시했듯이 바르트에게 ‘드러난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객관적이고 규정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사람 각자마다 전혀 다르게 계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다르면 계시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바르트가 인식된 것만을 계시라고 하는데, 인식된 것도 임시적인 가치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인식 체계는 광범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으로 분류한다. 바르트 학의 전제가 검토 가능한 것으로 규정하여 인식을 추구하지만 절대지식을 확립할 수 없는 불가지론이다. 이러한 신학 구도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도(Theologie von unten, from below)라고 해야 한다. 바르트가 계시를 강조하기 때문에 간혹 위에서 아래로의 신학(Theologie von oben, from above)이라고 하는 연구자가 있는데, 계시가 인간 내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바르트가 자유주의의 대부인 슐라이어마허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범주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가 자유주의를 초절주의로 극복했다는 제언은 계시를 사용한 것으로 절반만 맞다. 여전히 인간이 신학의 판정관이 되는데, 인간이 판정하지 못함을 강조함으로 불가지론에 빠졌다. 불가지론은 계몽철학의 (악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현대 정신세계를 구성시키는 가장 강력한 겸손한 (겸손을 가장한) 지식 체계이다. 계몽철학에서 말하는 관용과 성경이 말하는 관용은 전혀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관용은 인내와 온유를 일으키는 성품이지만, 계몽철학에서 관용은 악을 포용하고 창조 질서를 교리(Dogma)로 만들어서 폐기하려고 한다.
바르트가 사용하고 있는 ‘드러난 하나님과 감추어진 하나님’은 루터의 신학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믿음의 주의 구속 인식된 것만 취급하는 바르트의 신학이다. 루터 신학은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으로 연결되어, 십자가가 인식 기관으로 완전히 드러난 것으로 제시한다. “드러난(계시된) 하나님, 감추어진(은폐된) 하나님(deus revelatus et deus absconditus)”이란 용어는 인식된 범위에서만 고백하겠다는 바르트의 선언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교리를 진리 됨을 믿고 인지되지 않았음에도 확실히 믿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부여한 진리 체계를 인식하려고 부단한 정진을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겸손을 가장한 아집이다. 비록 교회의 사역자는 비록 알고 파악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닦고 연마하며 익힐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주일 오후에 신앙고백서(요리문답)를 강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피로 세운 교리 체계를 닦고 연마함으로 그들에 준하는, 그리고 선배들이 부족했던 부분을 파악하며 풍성한 진리 체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 방식을 따르면 인간의 게으름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어떤 얽매임도 우상숭배 혹은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계시가 어느 방편에서도 자유롭게 발생하기 때문에 악과 선의 구별도 없다. 계시가 발생하면 선이고 발생하지 않아도 선이다. '악(惡)'은 계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절대자 신(神)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된다. 자유주의에는 악 개념이 없는데(탐구), 현대신학에는 악 개념을 상정해서 파괴할(변증법, 건설적 파괴) 것을 추구한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말라기서 뒤의 마태복음 |
‘온’과 밀접한 공간과 인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