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나사렛 랍비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라고 분류하는 학자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너무나 과도하게 기독론 중심”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큰 학자를 한 부류로 묶기는 쉽지 않다. 칼빈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등등으로 규정한다. 이런 경우를 장님이 코끼리코 만지기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인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 한마디를 남기지 않았기도 하다. 그런데도 필자는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 중심 신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이해하는 예수는 어떤 수준일까?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가 이해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전통적인 예수 이해 방식을 거부한다고 제시했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제시를 읽는 독자는 반드시 자기가 믿는 예수를 고백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물었던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너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당시 사람들은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따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이 믿음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셨다.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수를 세례 요한의 제자, 혁명가, 선지자, 휴머니스트, 신의식이 충만한 자, 랍비 등으로 말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예수를 “나사렛 랍비”로 규정했다(KD., I/1, 171).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고 하는가?(Who is Jesus?/Jesus asked.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일단 성경에서 예수를 랍비라고 부르기도 했다(요 1:38). ‘랍비’는 ‘나의 큰 자’라는 뜻이지만, ‘선생님’이란 일반명사로 부르기도 한다. 유대인들이 ‘랍비’라고 부를 때에는 율법 전문가 혹은 회당에서 강론하는 선생 등을 부를 때 사용했다.
예수를 이해하는 방향은 “예수의 존재”가 구원을 가져왔는가? “예수의 가르침”이 구원을 가져왔는가? 라고 크게 나뉘는데, 두 논의는 정통 신학의 고백과 전혀 다른 진행이다. 예수의 존재가 구원을 가져왔다는 개념이 참 그리스도인에게 혼동을 가져오는 부분이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르침을 배워 깨달음으로 구원의 도를 이루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를 랍비로 이해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역사적으로 탐구되기 어려우며, 비록 알려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종교의 창설자들과 비교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나사렛의 랍비이며, 더욱이 자신의 종교의 후기의 어떤 대표자들과도 비교되어 진다.(KD., I/1, 171)” 바르트가 제시하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은 “인간 예수”에서 시작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기독론 중심 신학이기 때문에 정통 신학 중의 정통 신학이 아니라, 인간 예수로 체계화한 발티즘(Barthism)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발티즘을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정의했다. 칼빈주의(Calvinism)는 루터파에서 명명해준 것이다. 발티즘을 신정통주의라고 명명한 주체는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자체에서 자기 정체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신정통주의를 거부하는 진영에서 발티안(Barthian)으로 규정한다. 개혁신학을 한다면서 바르트 신학에 우호적이면서도 발티안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주저하는 경향도 있다. 일단 바르트 신학에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진영까지 발티안으로 분류해야 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담론은 이미 발티즘을 넘어서 다른 세대까지 진행했기 때문이다. 새관점학파(NPP)에서는 발티즘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발티즘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포괄적인 신학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적극적인 거부를 표해도 바르트의 영향에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적 태도는 거의 바르트의 소용돌이 외부에서 더 빠르게 돌고 있을 것이다. WCC(세계교회협의회), 종교 다원주의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하려 한다면 발티즘은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발티즘을 계시연속주의, 계시발생주의, 계시일원주의로 계시 이해를 제시했다. 그리고 지금은 “인식을 추구하는 믿음”과 “인간 예수”를 제시하는 바르트의 신학 진행을 비평하고 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바르트 신학은 위험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자기의 발톱을 숨기지 않으며 아름답게 보이도록 장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 신학에 동조하는 것은 절대로 바르트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동의한 것이다. 13권이 너무나 방대해서 파악할 수 없다고 겸손을 표할 수도 있다. 필자는 바르트 신학을 공부하면서 비평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강단에 서지 못하고 산골에서 10여 년을 보냈다. 여러 탁월한 학자들이 바르트를 잘 비평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바르트 신학에 중도적인 태도를 가르친다. 학자적인 양심일 수 있겠지만 목사와 아버지의 양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확인되지 않는 음식을 자녀에게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마 7:11-12). 필자는 목사로 사도 바울이 제시한 사역 매뉴얼, 아비의 심정으로 사역한다고 생각한다(고전 4:15-16). 음식의 안전 상태가 확인되지 않은 것을 자녀에게 임의로 취하라고 않고 반드시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그들이 성장하면 취함과 취하지 못함을 스스로 분별하고, 자녀와 후진들을 양육할 것이다.
필자도 바르트의 신학을 분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부한 학위 논문을 진행했다. 필자는 서철원 박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스승인 반틸(Van Til), 박형룡 박사의 가르침에서 일관한 바르트에 대한 위험성과 비판을 받아 진행했다. 그리고 학위 과정을 진행하면서 선생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하고 진행했다. 서철원은 네덜란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 A Study in the Relation of the Incarnation and the Creation, Vrije Univ, 1982), 지도교수인 베인호프(J. Veenhof)는 발티안이었다. 그래서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것을 논문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했고, 창조 이해를 쓰는 것임에도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논문에 각주로 첨가했다. 그리고 그 논문은 튀빙겐 대학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논문에 선정되었다. 서철원의 박사논문은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는 내용을 발티안의 아성에서 20세기 탁월한 논문 중에 하나라고 인증한 사상이다.
바르트가 구조시킨 기독론 중심 신학은 “인간 예수”로 이룬 것이고, 인간 예수로 체계화된 신학에서 삼위일체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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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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