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02-06 21:1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불신앙으로서 종교 (1)


우리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7의 제목은 “종교의 지양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Gottes Offenbarung als Aufhebung der Religion)”에서 당시까지 내려오는 종교 이해를 전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Eine theologische Würdigung der Religion und der Religionen(종교와 종교들의 신학적 평가) wird sich gewiß vor allem durch eine große Behutsamkeit und Barmherzigkeit(조심성과 자비심, cautiousness and charity) ihrer Beobachtung(관찰) und ihrer Werturteile(가치판단) auszuzeichnen haben(KD., I/2, 324; GG., 371; CD, 297). 바르트는 “종교와 종교들”로 문장을 구사했다. 종교는 교회(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종교들은 제종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교회가 믿는 신앙을 포함한 모든 종교들의 측정과 가치평가 기준이 Behutsamkeit und Barmherzigkeit(신중함(조심성)과 자비(자선))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모든 종교의 기준을 하나로 규정한 것이다. 바르트가 종교성을 판단하도록 기준을 제시했다. 우리는 바르트가 제시한 제언은 개인적인 자격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종교 개념을 정확하게 세워야 바르트의 논리를 따를 수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단순하게 “우리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규정해버린다면 바르트의 주장은 한 순간에 무시할 수는 있겠지만, 바르트의 논리를 분석할 수 없게 되고, 또한 바르트가 내놓은 무시무시한 영향력과 실상들을 분석하거나 변론할 수 없게 된다.

바르트는 종교의 주체(das Subjekt der Religion)에 대해서 논한다. 바르트의 놀라운 제시가 나온다. 바르트는 종교의 주체를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 그 자체도 아니라고 규정한다(nicht gelöst von Gott, nicht in einem menschlichen An-sich). 바르트가 인간에게 내재적 신관을 부정했다는 부분과, 초월적 신관도 아님을 알 수 있다. menschlichen An-sich은 Ding an sich(물자체)에 대한 어휘를 “사람 그 자체(per se)”로 사용한 것은 특이한 모습이다. 바르트는 종교의 주체를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종교의 기원과 주체를 하나님으로 규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라고 세우고 있다.

바르트는 신도 인간도 종교의 주체가 아니고, 그리스도 주가 주체라고 제언한다. 마치 우리의 주장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 있는 문장이 눈에 띈다. “der in Christus (wiederum ob er es weiß oder nicht)”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택한 백성들을 알지 못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 제시에 대해서 반대되는 진술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바르트의 교회는 설교에 의한 믿음 생활이 아니라, 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무한한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신도 자기 백성에 대해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사랑하고, 사람도 자기 신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이 용납되는 구조이다. 바르트는 종교를 이러한 인간의 행동으로 규정했다(Als eine Lebensäußerung und Handlung dieses Menschen wird sie auch die Religion verstehen).

바르트는 그리스도 주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서 신의 계시로부터 종교의 본질을 규정한다. 바르트의 계시는 교회에 한정되어 수행되는 신의 행동이 아니다. 물론 계시가 교회에도 있다. 그러나 제종교에서 신의 계시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불가지적 성향으로 제시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것은 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판단을 유보시키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인간이 종교적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는 것을 적당하게 여기지 않는다(GG., 371). 바르트의 제시가 매우 겸손하고 관용과 포용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르트는 정작 정통 기독교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낭만적 성향으로 합리적 비판을 가했지만 합리성이 확보되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정죄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참종교와 거짓종교를 측정하고 판단하고 있다. 바르트가 주장하는 신의 자유 안에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 판단이 없는 세상은 창조 이래에 존재하지 않았다. 창세기 2장(바르트는 아담의 역사 실재를 믿지 않지만)에서 범죄 이전의 아담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음과 먹음의 판단(선택) 앞에 놓여 있었다. 사람이 판단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판단하지 않음을 판단하는 판단(선택)의 존재이다. 바르트의 상상은 자유주의 상상보다 더 파격적인 상상에 정통 기독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포함하고 있다. 그가 규정한 불신앙은 교회만이 진리의 기관이라는 배타적 기독교에 대해 불쾌감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이해하는 것을 금지시켰다(GG., 371). 바르트의 이러한 사상은 슐라이어마허의 개념을 능가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유일신 체계의 종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묶으려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우수성과 탁월성을 견지한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자인 바르트는 기독교 우수성까지 제거하고 모든 종교와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하며, 이것을 반대하는 기독교를 배척한다(불신앙으로서 종교).

바르트는 “신의 계시(Gottes Offenbarung)”와 “계시의 은혜(der Gnade der Offenbarung)”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 은혜를 개념화시킨다. 은혜(grace) 개념을 명확하게 세우는 것은 쉽지 않지만 반복해서 자기 은혜 개념을 확립해야 한다. “바르트의 은혜는 무한한 신의 개방성”으로 필자는 정리해 본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교회”와 “무한한 신의 개방성으로서 은혜의 교회”가 대조된다. 그리스도의 계시와 하나님의 계시를 대조시킨다. 바르트는 신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무한한 개방성에서 신의 계시가 가능하게 된다. 바르트는 신의 계시가 임하는 장소가 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그 계시가 임하면 종교가 되고, 제종교에 신의 계시가 임하면 종교가 된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교만하지 말고 신의 개방성에서 겸손하게 서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세계전쟁 속에서 평화, 싸움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능가한 사유 체계에 대한 꿈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쟁을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마 10장; 눅 12:51-53). 그리스도인은 분쟁과 미움과 시기 속에서 사랑과 겸손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하지 않는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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