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02-28 10:1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불신앙으로서 종교 (2) 종교: 인간이 심판하는 것과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2』, § 17에서 “종교의 지양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Gottes Offenbarung als Aufhebung der Religion)”를 제시하고 있다. 2번째 부분에서 “불신앙으로서 종교(Religion als Unglaube)”를 설명하고 있다. 바르트는 “종교는 불신앙이다(Religion ist Unglaube)”라고 규정한다(KD., 327, GG., 373). 바르트는 종교를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관심(die Angelegenheit des gottlosen Menschen)”으로 규정했다. 바르트가 “인간의 관심(Angelegenheit)”이 아닌 “신의 자유로 신학”으로 설득하기 때문에, 멋있는 신학 제언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의 자유와 사랑으로 구상하는 멋있는 신학을 왜 우리는 거부하려는 것인가? 그에게는 계시, 예수 그리스도 등등 사랑하는 복된 어휘가 그렇게 충만한데, 왜 거부하는 것인가? 서철원 박사는 쉽게 “십자가 피의 구속의 복음이 없다”, 즉 “죄사함의 복음”이 없는 구도라고 제시했다. 죄사함의 복음, 피의 구속의 은혜가 없으면 삼위일체도 없다. 또한 성육신도 없다.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이다(요일 5:5-9).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바르트는 헤겔의 종교철학(Hegelschen Religionsphi-losophie)을 제시한다(GG., 372). 바르트는 계몽철학자 헤겔을 비판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관용(Geduld, tolerance)”에 대한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바르트는 관용의 불충분성을 지적하면서, “관용이란 사실상 실제로 비관용의 최악의 형식”(GG., 373)이라고 제시했다. 계몽철학의 관용은 제한이 없는 관용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는 관용이 제한적인데, 관용이 없는 상대가 바로 “신이 없는 사람의 관심으로 만들어진 종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특이하게 모든 종교들에 관용하며 유사성 혹은 일치성을 주장하지만, 정통신앙의 기독교에 대해서 비관용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교적 종교의 장소로서의 교회 안에서 요청되고 또 가능한, 종교와 종교들에 대한 참으로 신학적인 성찰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대상에 대한 대단히 특별한 관용의 행사를 통하여 다른 성찰들의 방식들로부터 확연히 구분된다.” Eine wirklich theologische Betrachtung der Religion und der Religionen, wie sie gerade in der Kirche als der Stätte der christlichen Religion gefordert und auch möglich ist, wird sich also vor allem in der Übung einer ausgezeichneten Geduld gegenüber diesem Gegenstand von anderen Betrachtungsweisen abzuheben haben(GG., 372, KD., 326). 바르트는 교회를 “그리스도적 종교의 장소”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교회에서 종교와 종교들이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참된 신학적 성찰(Eine wirklich theologische Betrachtung, §1. 참조)을 통해서 관용을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수행하는 “특별한 관용(very marked tolerance)”과 계몽철학의 무제한적 관용을 거부한다. 바르트는 상대주의와 역사적 회의주의의 비편파성(Relativismus und der Unbeteiligtheit einer historischen Skepsis, GG., 373)으로 정리했다. 바르트는 교회 안에 “신을 상실한 인간”이 있다고 규정한다. 신을 상실한 인간은 인간의 관심으로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바르트의 저술에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지만, 1890년에 J.G.프레이저(1854-1941)는 『황금가지: 비교종교학 연구』(The Golden Bough: A Study in Comparative Religion)를 출판했다. 종교가 인간의 필요(두려움 회피, 욕망의 회피)에 의해서 산출되었다는 개념이 나타나던 시기이다. 계몽철학의 이신론적 세계관에서 종교가 신의 구상물이 아닌 인간의 구상물로 전환되었다. 바르트는 그러한 사조를 따르고 있으며, 교회가 세우고 있는 전통적인 신앙 체계에 대해서는 회의(Skepsis)와 거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에서 참된 예배라고 하면서 인간의 경건으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GG., 373). 바르트가 인용한 글은 루터의 글(Luther, Pred. üb. 1. Petr. 1, 18 f., 1523, W. A. 12, 291, 33)이다(GG., 374). 바르트는 루터가 비판한 로마 카톨릭주의의 신성모독적 행위를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몽철학, 로마 카톨릭주의, 개혁 교회 모두를 비판하며, 자기 테제를 세우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명제를 반틸 박사는 철저하게 거부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를 세웠다. 반틸은 신 존재에 근거한 전제주의이다. 즉 바르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거부하고 불가지론적 사유를 진행한다.

바르트는 루터의 문장, “하나님의 피에 의한 은혜를 얻지 않으려는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GG., 374)라고 인용했으면서도, 그 문장을 따르지 않았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하나님의 피의 은혜의 교리(das blutt von Got will gnad erlangen)”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판한 것인데, 바르트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로 종교를 심판(das Urteil der göttlichen Offenbarung)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GG., 374). 바르트는 가장 높은 원칙을 ‘계시’라고 했다.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GG., 374). 그의 주장이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판단이 적용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복음이 선포되는 장소이다.

바르트는 오직 하나님의 심판에 굴복하겠다고 선언한다. 바르트가 성상파괴(Christian iconoclasts)에 대해서 제시하는데, 성상파괴를 인간의 심판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르트는 성상파괴를 교회 안에 있는 성상과 함께 타 종교의 성상파괴로 제시했다. 그것은 교회사의 전개에서 적요한 이해가 아니다. 전자는 은혜의 방편에 대한 것이고, 타종교는 우상숭배에 대한 것이다. 물론 기독교 제국에서 이방 신전을 파괴했는데 그것을 성상파괴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바람직한 정책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1,000년 전의 사고방식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바르트는 성상을 파괴하는 두 형태 모두 인간의 판단으로 규정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심판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유기된 자는 스스로 유기를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바르트는 본격적으로 종교가 불신앙이라는 것을 전개한다. “종교가 참으로 불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성서 안에서 증거된 계시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명료성을 주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GG., 375).

바르트는 종교를 “인간이 심판하는 것과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으로 대조시키며 후자를 주장한다. 바르트는 기존 교회는 인간이 심판하는 형태의 종교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종교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그 인간에게 있는 신의식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되게 섬김으로 참 종교를 이루게 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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