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4장 스콜라 신학자들의 회개론
칼빈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는 의미와 죄 사함의 고백에 대한 이유를 아래의 논증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성경에는 한 가지 고백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곧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시고 씻어 비리시는 분이 주님이시므로 우리가 그에게 우리 죄를 고백하여 사하심을 받자는 것이다. (중략) 요한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실 것이라고 말한다(요일 1:9). 누구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겠는가? 주님이 아니고 누구에게 고백하겠는가? 괴롭고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 앞에서 전심으로 우리 자신을 책하고 정죄하며,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용서 받기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행할 자세를 갖추는 법이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번 귓속말로 마음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자주, 온 세상이 듣도록 자기 자신의 불경스러움과 또한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하심을 꾸밈없이 공개하는 것이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양심에 찔림을 받자,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밀한 가운데 고백한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나 우리의 낮아짐을 위해서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 가운데서 기꺼이 고백하는 자세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옛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제사장이 성전에서 말씀을 낭송한 다음 백성들이 자기들의 범죄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일을 제정하신 것이다(참조 레 16:21).
그리스도인들이 이런저런 공적인 고백의 행사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기를 실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영해 마지않을 규례라고 보는 나의 생각에 함께 동의하게 될 것이다. (중략) 사실, 질서가 잘 잡힌 교회들에서 이런 관례가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을 우리도 보고 있다. 곧 매 주일 마다 목사가 자기의 이름과 교인들의 이름으로 고백의 문구의 틀을 짜서 그것으로 주님 앞에서 자기들의 모든 사악함을 책하고 용서를 간구하는 관례 말이다. (중략)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교회의 목회자에게 사적으로 고백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며, 위로를 얻기 위해서 사적으로 그의 도움을 구하여야 한다.
위의 글에서 나타난 칼빈의 회개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하며 고백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낮아지는 겸손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스콜라학파는 사제에게 죄에 대한 고해성사를 해야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으며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반면, 칼빈은 원죄의 속죄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성립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범죄 사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면서, 가급적이면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불경스러움과 하나님의 위엄을 꾸밈없이 공개함으로써 자기를 낮추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기 힘든 경우에는 자기 교회의 목회자를 통해서라도 고백하여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죄 사함에 대한 칼빈과
스콜라학파의 차이점
칼빈과 스콜라학파의 차이점은, 칼빈은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가 성립되지만 자범죄에 대한 회개는 대중들 앞에서나 목회자를 통해서라도 용서를 받아야한다는 견해인 반면, 스콜라학파는 사제에 의해서 고해성사가 실행되어야만 용서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또한 두 견해의 유사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았지만 자범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의 과정이 필요하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칼빈의 주장은 복음적이며 타당하다. 그러나 범죄에 대한 회개의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지나친 면이 있어 보인다. 그의 주장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한 것이라면, 회개 역시 뉘우침의 의미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우선해야 되고 그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반성하는 차원이라야 한다. 만약 회개와 사죄를 연결시켜서 생각한다면, 결국에는 죄책감에 의한 두려움이 가중되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회개에 대한 칼빈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고백과 죄 사함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했으면 한다. 물론 칼빈의 논지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일방적이고 영원한 속죄를 주장하며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확고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백과 죄 용서의 관계를 연계시켜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도 속죄와 용서의 의미를 연결시키면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하여 영원한 속죄를 받았다면 죄 용서를 위한 회개는 성립되지 않는다. 회개의 올바른 의미는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한다는데 있다.
회개는 일반적으로 죄와 결부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회개’라는 용어는 ‘죄 용서’와 밀착되어 되어있다. 회개에 대한 개념이 사죄와 연계되어져서 형성된 이유 중에는 죄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이나 후손들의 자범죄는 무조건 악한 것이며, 성도들은 언제나 회개가 생활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더욱이 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단정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부분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서 궁극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의 사례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인해 후손들이 영적으로 사망한 상태로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살고 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전(殿)이며,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불러주심으로써 생동감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셨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고, 노예로 팔리어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는 계기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노예에서 총리신분으로 수직상승을 시켜주셨다. 유대민족은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으나 파사를 통하여 해방의 감격을 누리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죄인의 몸으로 죽게 하셨으나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영광의 주(主)가 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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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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